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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아서 감히 군수물자라 하였으며, 전곡을 배당하고 징수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였다. (중략) 다행히 지 난 음력 12월 6일(양 ’95.1.1-저자주) 관리들과 주민들이 의로써 떨쳐 일어나 도집강 접주 접사 성 찰 거괴 등과 그 餘黨 수백명을 일망타진하였다(「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80쪽) ② 지난 1895년 1월 1일 (양력) 순천부에서 일시 동학도에 붙었던 지방 吏員과 인민은 돌연 순천부의 경상 전라 동학도의 본영을 습격하여 동학도 수령의 한 사람인 鄭虞炯 이하를 살해하였다(『二六新 報』 1895년 1월 13일자). ③ 본부의 三班과 성 안의 백성들이 공분을 터뜨려 당일 4시경에 동비가 모여 있는 본부의 도회소를 쳐부수고 거괴 정우형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문가, 梁哲敎, 진주의 梁五衛將이라고 칭하는 자 및 隨從 者 50여 명을 모두 체포하여 살해하였으므로 수비하고 있는 이 성 밖의 추종자들에게도 별도로 영을 내려 기어이 귀화시킬 계획이라는 사유를 장계에 적어 아룁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쪽) 위의 인용문을 종합하여 보면, 1895년 1월 1일 새벽 4시경 순천의 향리와 군교 및 일부 주민들은 영호도회소의 본영을 습격하여 순천 쌍암출신의 영호도집강 정우형 등 수백 명을 일망타진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 이름도 알 수 없는 94명의 농민군이 몽둥이로 타살된 점 395) 으로 보아 얼마나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군이 순천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순천성 안에는 농민군의 시체가 400여 구나 버려져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396) 이들은 대부분 守城軍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음력 12월 6일(양 1.1)에서 12일 사이에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의 지도자와 농민군은 최소한 112명이나 희생되었다. 397) 당시에 총살되거나 효수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도집강이하 성찰 접주 서기 접사 농민군 등 다양한 직책을 맡고 있던 자들이었다. 이 가운데 도집강 정우형만이 6일 포살되었으며, 나머지 농민군은 갇혀 있다가 음력 12월 10일 좌수영 군대가 순천에 온 이후에 주로 좌수영에 옮겨진 후 희생되었다. 심지어 순천부 좌수와 공형 역시 좌수영에 압송되어 억울하게 포살된 경우도 있었다. 398) 한편, 영호도회소로부터 순천성을 탈환한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볼 차례이다. 이들은 대체로 각읍의 아전과 군교들을 중심으로 다투어 일어났다. 대부분의 수령이 도망한 상태였으므로 이들은 믿고 따르는 사람을 추대하여 통솔자로 삼았다. 전라좌도의 10여 개 읍이 서로 호응하여 구례는 음력 12월 3일, 순천은 5일, 광양은 6일에 연달아 일어났다. 399) 395) 『각사등록』 54, 729쪽. 39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0쪽. 397) 위와 같음. 398)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81쪽. 399) 황현, 『번역 오하기문』,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