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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싸우는 것은 집안이 망할 일이니 우리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합하여 異類(일본군-저자주)를 막자”고 호소하였다. 389) 그러나 성안의 반응은 냉담하였으며, 오히려 수비가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주변의 이른바 진과 포, 즉 군사적 요충지에 주둔한 군대와 포수를 동원하여 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개의치 않고 농민군은 야간공격을 단행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덕양역으로 물러났다. 당시 농민군은 6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는데, 좌수영의 군인들이 죽은 농민군 시체의 목을 잘라 성문에 걸고, 그 몸둥이는 바다에 던져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 390) 이 소식을 전해들은 농민군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만약 좌수영을 점령하면 그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마음다짐을 굳게 하면서 약 3일동안 지친 몸을 쉬었다. 농민군 지도부는 좌수영을 공격하기 위한 계책 마련에 분주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농민군이 완전히 퇴각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좌수영을 공격해 오는 것도 아니어서 좌수영군도 내심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좌수영군은 음력 11월 20일(양 12.16) 밤에 30리 밖의 덕양역에 주둔한 농민군을 내쫓기 위하여 선제공격을 단행하였다. 농민군은 충분한 휴식과 관군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덕양역 주위의 산등성이를 배경삼아 바로 응전하였다. 좌수영의 營將 李周會가 이끈 좌수영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군이 이처럼 대비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30리를 행군한데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위까지 겹쳐 여러 모로 불리하였다. 결국, 좌수영군은 농민군의 저항에 맞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오던 길을 되짚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사기가 오른 농민군은 관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드디어 좌수영에 도달하자, 성 안의 관군들이 사력을 다해 격렬히 저항하였다. 날은 이미 저물고 있어서 총을 쏘아도 잘 맞지 않았다. 농민군은 성 주변에 있는 민가에 불을 질렀다. 화공작전을 펼쳐서 불기운이 성안까지 번지면 항복하리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강한 바람을 타고 화염이 치솟자, 성 안의 군대와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불이 번지지 못하게 하였다. 다행히 성벽이 높아 불길은 성안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성 주변의 민가 5백여 채가 불에 타버렸다. 391)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좌수영이 마주 보이는 곳에 진을 치고서 정예병을 서문 밖에 주둔시키는 한편, 부대를 나누어 종고산을 점거하고서 지구전을 펼치려고 하였다. 392) 그러자 성 안팍의 주민들은 동요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관군의 핵심인물인 영장 이주회까지도 동요할 정도였다. 393) 그만큼 좌수영은 고립되어 있었으며,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좌수사 김철규는 음력 11월 25일(양 12.21)에 여수 앞바다에 정박중인 일본 해군 筑波號 함장에게 389) 구양근, 앞의 책, 469쪽. 390) 위와 같음. 39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241쪽. 392) 황현, 『번역 오하기문』, 285쪽. 393) 김계유 편, 『여수여천발전사』, 265∼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