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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11 목적지는 모두 전라도였는데, 특히 농민군을 전라도의 서남부, 즉 강진 해남방면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작전으로 일관하였다. 385) 이는, 농민군을 한 구석으로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이었다. 전라도에 출동한 일본군은 정예의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로서 11월 12일에 신식무기를 앞세우고 남하하였다. 이에 따라 영호도회소는 농민군의 활로를 뚫은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당시의 농민군이 매우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는 적이 패하였다는 소문이 떠들썩하였다. 적 중에 전라지방에 있는 자들은 동쪽으로는 운 뵹에 막히고, 아래로는 하동을 겁내고, 남쪽은 좌수영을 꺼리어 각각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서 이미 궤멸될 기미가 드러나고 있었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79쪽) 인용문에 있듯이, 사방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에 대한 포위망을 죄이자, 농민군들이 크게 동요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김인배는 12월 초순 전라좌도 지역에서 활동중인 여러 접주들과 협의하여 좌수영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그는 여수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좌수영을 확보하여 지구전을 벌이거나, 여의치 않으면 바다를 통해 남해의 수많은 섬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386) 드디어 음력 11월 10일(양 12.6),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는 수만 명을 이끌고 좌수영으로 향하였다. 387) 그는 하동에서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로 생각하고서 좌수영을 반드시 점령할 의지를 불태웠다. 좌수영은 바다쪽으로 움푹 들어간 국자 모양으로 생긴 고립된 지형이었다. 이에 김인배는 우선 쌀장수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바다를 봉쇄하여 뱃길을 끊음으로써 좌수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순천을 출발한 농민군은 여천의 덕양역에서 좌수영의 정찰병을 쉽게 물리치는 등 순조롭게 좌수영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여수에 도착하여 鍾鼓山을 점령하고서 좌수영을 위협하였다. 이에 맞서 좌수사 김철규는 성주민들을 결속시켜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추위가 몰아닥쳤다. 따라서 종고산 위에 주둔한 농민군들은 살을 에이는 바다바람을 견딜 수 없었다. 농민군들은 주변의 촌락으로 흩어져 끼니를 때우거나, 혹은 날라온 먹을 거리조차 꽁꽁 얼어붙어 씹을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388) 결국 영호도회소의 농민군들은 일단 순천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다시 전열을 정비한 김인배는 음력 11월16일(12. 12) 낙안출신 李守喜를 중군장으로 삼아 다시 좌수영 공격에 나섰다. 또한 여천군 쌍봉면(현 여천시) 출신의 朴君河 尹京三과 돌산 출신의 黃鍾來 등이 좌수영 공격을 선도하였다. 농민군은 공격에 앞서 좌수영에 고시문을 보내어 “형제끼리 385)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60쪽. 386) 이이화, 『발굴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102쪽. 387) 황현, 『번역 오하기문』, 282쪽. 388) 위의 책, 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