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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09 한편, 낙안의 농민군은 영호도회소의 낙안읍성 공격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낙안군 집강 金士逸은 보성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방어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배하였다는 것이다. 377) 다시 말해 농민군측의 경우에도 이해가 엇갈려 서로 전투를 벌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낙안의 농민군들은 집강 김사일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근거지인 낙안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며, 여기에 낙안의 지척에 있는 보성의 농민군들도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하여 낙안의 농민군을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1천여 명의 영호도회소 농민군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농민군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았다고 해서인지 더욱 가혹하게 징발 당하고 말았다. 378) 낙안을 점령한 양하일의 농민군은 향교에 들어가 창고의 문을 부수고서 書冊과 기물을 접수하였으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향교의 교임 9명을 구타하였다. 이교청의 문서를 꺼내어 소각해버렸으며, 저항한 민가 149호를 불을 놓았으며, 빼앗은 군수품은 농우 55마리, 의복과 기물 등은 우마로 50여 바리와 40여 명이 짊어지고 가야 할 정도였다. 이처럼 막대한 군수물자를 확보한 농민군은 대부분 다시 선암사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성 밖으로 진출하였다. 이는, 영남 진출을 위한 군수품을 확보하고 배후의 안정을 기하려는 목적으로 낙안을 공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3) 전라좌수영 공방전 현재의 여수에 자리한 全羅左水營은 동학교인이나 농민군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1894년 6월이후 농민군이 집강소 활동에 들어갈 무렵 좌수영에 짤막한 공문이 도착하였다. 즉, 그 내용중에 농민군이 바야흐로 귀순하거나 해산중이니 지난날 각읍에서 모집한 군병은 돌려보내어 각자 安業하도록 하고, 본영 소재의 포군은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고 파수와 정찰에 전념하면서 농민군의 동향을 감시하라는 내용이었다. 379) 여수 부근 巨文島에서 관할하는 여러 섬에서도 동학농민군이 활동한 것 같다. 380) 하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당시 전라좌수사 李鳳鎬는 농민군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으나, 곧바로 체임되고 후임으로 金徹圭가 음력 7월 초에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하는 도중 농민군에게 봉변을 당하였는데, 그러한 사정이 전봉준에게 알려졌다. 381) 전봉준은 김철규에게 곧바로 통행증을 발급해주는 한편, 집강소의 성찰 4명으로 하여금 호위케 하여 무사히 여수에 도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착한 직후부터 농민군으로부터 좌수영을 방어하기 위한 방안을 군교와 은밀히 모색하였다. 김철규는 좌수영내의 군인들과 주민들을 결속시켜 농민군을 체포, 탄압하였다. 이후 좌수영의 농민군 세력은 급격하게 감소된 것 같다. 아울러 김철규는 서울 사람 李豊泳을 시켜 일본군 수백 명을 377) 위와 같음. 378) 이하는 『고문서』 2, 413쪽 참조. 379) 「兩湖招討謄錄」, 『동학란기록』 상, 213쪽. 380) 「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위의 책 하, 327쪽. 381) 이하 좌수영의 대응에 관한 내용은 『번역 오하기문』(203·266쪽)을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