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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들은 음력 9월 19일부터 24일(양 10.17∼22) 사이에 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영호도회소와 현지에서 봉기한 농민군들은 경남 서부지역의 관아를 돌며 군량을 비롯한 군수품을 확보하고 나아가 죄수의 석방과 무기를 탈취하는 등 완전히 읍권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나아가 농민군 수천 명을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부산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366) 농민군은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내쫓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농민군의 세력이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에서 급속하게 확대되자, 조선의 개화정권과 일본측은 각각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조정과 감영에서는 대구판관 池錫永을 討捕使로 임명하여 진주와 하동 등지의 농민군을 진압케 하였는데, 통영의 관군 및 군수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일본측에서도 영호도회소가 하동을 점령할 무렵부터 농민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군대의 파견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367) 일본측은 농민군의 세력기반을 없애야만 조선에서의 군사활동이 원활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는 10월 중순경 이미 헌병과 순사를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으며, 병참부와 군용전선을 보호하기 위한 병력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 368) 이에 따라 10월 23일 부산영사관에서는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을 비롯한 군수요원 약 200명을 파견하였다. 369) 이들은 10월 27일부터 하동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돌입하였다. 370) 11월 5일에는 일본군과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이후 12월 초순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농민군에게 전세는 점차 불리하게 진행되어갔다. 371) 그 가운데 몇 개의 전투 상황을 예시하면 아래와 같다. 11월 6일 농민군 지도자 林石俊은 토포사 지석영에게 체포되어 곤양군 성북 시장에서 효수되는 것을 시작으로 농민군의 희생이 줄을 이었다. 8일 새벽에는 하동의 安心洞 뒷산인 金鰲山에 집결한 수백명의 농민군이 기습을 받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0일과 11일 사이에는 경남 서부지역의 마지막 대회전이 水谷面의 高僧山城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농민군 수천 명은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우다 적어도 186명이 전사하고 2명이 피체되었으며, 화약 30관·한국돈 6관790문·우마 19두·쌀 5두·총 136정·칼 18자루·나팔 3·깃발 3·화살 2다발·창 54자루를 빼앗기는 등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372) 전북 익산 출신의 三南都省察 金商奎 등이 체포되어 진주의 시장에서 효수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후 단성 산청 함양 거창 안의 등 경남 서부지역에서 활동중인 농민군들도 대부분 하동과 광양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36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3, 358쪽. 36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 71∼72쪽 368) 위의 책 1, 129쪽. 369) 김준형, 앞의 논문, 95쪽. 370) 위의 논문, 95∼96쪽. 371) 이후 전투상황은 『고문서』 2(417∼419쪽)를 참고하여 정리하였음. 372)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204∼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