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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05 음력 9월 중순경 진주 인근의 南海 泗川 固城 昆陽 등지에서도 농민군의 본격적인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호남의 농민군들이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361) 음력 9월 15일 광양과 순천의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깃발을 앞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곤양을 거쳐 거침없이 진주로 향하였다. 362) 이들은 같은 날 하동 多率寺에서 모인 하동 동학군 수천명과 진주 접경의 完沙驛에서 합세하였다. 363) 드디어 이들은 음력 9월 17일(양 10.15)에 진주에 무혈 입성하였으며, 다음날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들어왔다. 당시의 상황을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음력) 9월 17일 동도 수천 명이 하동으로부터 본주(진주-저자주)로 들어오자, 병사와 목사는 모두 나아가서 한편으로는 방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일렀다. 하지만 수많은 무리들은 그 기세를 타고 성내로 들어와 각 관청을 점령하여 (도)소를 설치하였다. 소위 도통령 鄭運昇은 수백 명, 중군장은 4 ∼5백명, 하동포는 7∼8백명, 우선봉장은 5∼6백명, 후군장은 4∼5백명, 都統察은 1백여 명을 거느 렸다. 기타 丹城包 南原包 涉川包 上平包 吾山包 求禮包는 각각 읍 근처에 흩어져 주둔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18일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1천여 명을 이끌고 吏廳으로 들어왔다. 징과 북소 리 그리고 포성이 뇌성과 같았으며, 총과 창검의 날카로움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군진의 앞에 커 다란 붉은 기를 세웠는데, “輔國安民” 넉 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고문서』 2, 407쪽)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진주관아는 음력 9월 17∼8일(양 10. 15∼6) 영호도회소를 중심한 동학농민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김인배를 정점으로 하는 수천 명의 농민군들이 조직적으로 편제되었으며 대단한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진주에는 목사와 병사가 있었지만 농민군을 전혀 저지할 상황이 못되었다. 오히려 진주병사 閔俊鎬는 吏校 30여 명을 인솔하여 농민군을 성 안으로 안내하고 잔치를 베풀어 위로할 정도로 농민군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364) 당시 진주 지역의 분위기가 농민군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농민군은 상당히 체계화된 군사조직을 운용한 점도 주목된다. 즉, 도통령 중군장 우선봉장 후군장 도통찰 등과 같은 편제로 보아 그러하다. 그리고 하동포 단성포 남원포 구례포 등의 包單位로 된 여러 개의 군사조직이 동시에 운용된 점도 눈에 띈다. 또한 섭천접 상평접 오산접 등은 진주 인근 지역의 동학조직이었다. 365) 이로써 볼 때 경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농민군은 다원적인 조직으로 운용되었음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농민군 조직들은 통일적인 군사조직체가 아니라 도소나 도회소 및 동학의 包接 단위가 함께 활동하는 연합부대의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361) 위의 논문, 92∼93쪽. 362) 『고문서』 2(서울대 규장각, 1987), 406쪽. 363) 위와 같음. 364) 이이화, 『발굴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118쪽. 365) 표영삼, 「경상도 남서부지역의 동학혁명」,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