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page

10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뒷산)에 진을 치고서 농민군을 격퇴할 준비를 마쳤다. 354) 음력 9월 2일(양 9.29) 초저녁, 농민군은 하동의 동학농민군 여장협이 이끄는 1천여 명과 합세하여 안봉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355) 이에 수천명을 동원한 하동의 민포군은 남북 좌우에서 협공하는 농민군을 맞아 대포를 쏘았으나 대부분 빗나가거나 폭발하지 않았다. 다만, 화개의 민포 35명은 농민군을 향하여 정확하게 사격함으로써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곧 어두움이 깔려 총을 쏘아도 명중되지 않자 민포군들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음력 9월 3일 날이 밝자, 농민군은 하동부에 들어가 하동부사 이채연의 집과 민포군과 관련된 민가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농민군은 하동부에 도소를 설치하고서 읍권을 장악하였다. 지난 7월 민포군에 쫓겨난 하동의 장사군을 중심한 일부의 농민군은 곧바로 민포군의 거점인 화개로 내달아 500여 채의 민포군의 집에 불을 질렀다. 민포군이 자신들의 처자와 집을 태운 것에 대한 보복인 셈이다. 아울러 미처 도망하지 못한 민포군 10여 명을 처형하였다. 또한 이들은 민포군의 재산을 빼앗아 군량으로 이용하기 위해 화개에서 광양·순천으로 운반하느라 길이 막힐 정도였다. 이처럼 하동 지역을 장악한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이곳에 5일 정도 머물며 군기를 정돈한 후 일부는 광양과 순천으로 되돌아갔고, 나머지는 김인배의 통솔하에 진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진주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9월 28일 진주와 단성의 동학교인과 농민군들이 모여들었으나, 진주의 경우에는 목사와 병사의 설득으로 일단 그 다음날 해산하였다. 356) 하지만 이 지역 동학농민군들은 음력 9월 2일자의 「晉州初次掛榜」이란 방문에서 음력 9월 8일(양 10.6)날 각 리마다 13명씩 3일분의 식량을 휴대하고서 廣灘津에 모이라고 하였다. 357) 실제로 진주의 73개 면마다 각 100명의 주민들이 읍내 시장가에 모여 민폐의 矯正을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11일 復興大牛峙에 모이라는 통문을 돌렸다. 358) 동시에 이들은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이미 진주에서 대회를 열었다는 것과 轉任되는 병사의 유임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진주대회를 열자고 忠慶大都所의 이름으로 통문을 발송하였다. 359) 이와 같이 진주는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이 들어오기 직전부터 동학교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폐정개혁을 주도하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진주의 동학교인들은 읍폐를 교정하기 위해 음력 9월14일에 읍내에서 취회한 다음, 場市에 장막을 설치하고서 인가의 毁燒와 동헌의 무단 출입 및 죄수 석방 등을 주도하였다. 360) 진주의 경우, 동학교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354) 여재규, 『하동군사』(1978), 249쪽. 355) 위와 같음. 356) 김준형, 앞의 논문, 90쪽의 주 58 참조. 35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39쪽. 358) 김준형, 앞의 논문, 91쪽. 359)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40∼141쪽. 360) 김준형, 앞의 논문,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