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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01 한편, 광양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알 수 없으나, 朴鶴日 등 49명이 음력 12월 22일 체포된 사실도 주목된다. 339) 또한 경상도 서부지역과 전남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다 광양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광양에서는 음력 12월 한달 동안 150여 명이 넘는 농민군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변낙중과 이경도의 활동에서 알 수 있듯이 광양의 농민군들은 주도적으로 경남 서부지역으로의 진출에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남 서부지역과 인접해 있다. 따라서 광양의 농민군들은 자연스럽게 하동 진주 등의 농민군과 연계 혹은 독자적으로 경상도 서부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이들은 영호도회소의 이름으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광양현의 관아에서 동쪽으로 40리쯤 가면 섬계역이 나온다. 340) 여기서 다시 약 20리만 가면 하동에 닿는다. 그 사이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하동은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위치해 있고 섬진강과 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남쪽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바로 곁에는 영호남의 경계를 휘어 안은 지리산이 버티며 하동을 감싸 안고 서 있다. 영호남의 중간에 위치한 화개는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화적의 소굴이 되어서 호남에서 내쫓기면 영남으로, 그리고 그 반대의 소란이 반복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341) 더욱이 화적을 잡는답시고 관가의 포졸이 드나들며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이 지역 주민들은 마을 단위로 군대의 편제를 갖추고 화포군을 만들어 대비하였는데, 이들을 '民砲'라고 불렀다. 342) 1894년 여름, 영호도회소의 농민군들이 하동의 동학조직과 접촉하고 있었다. 영호도회소는 전라도 관할지역에서 동학의 포교와 치안을 맡아 폐정개혁을 수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 걸맞게 경상도 서부 지역에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함으로써 집강소의 활동을 경상도까지 확대코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세력의 내륙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기지로 활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광양에 집결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하동의 장삿군과 협력하여 섬진강을 건너 하동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하동읍내에 都所를 설치하여 곧바로 집강소의 폐정개혁 활동에 들어갔다. 343) 그런데 하동부사 李采淵은 1894년 음력 6월29일에 부임하였다. 344) 이 때는 광양과 하동의 농민군이 연합하여 바야흐로 본격적인 집강소 활동을 서두르던 시기였다. 당시 하동의 동학교인은 광양의 농민군과 긴밀한 유대와 지원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활동중이었다. 345) 이에 이채연은 화개의 민포로 339)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10쪽. 340) 『邑誌』 4(아세아문화사, 1983), 194쪽. 341) 황현, 『번역 오하기문』, 203쪽. 342) 위와 같음. 343) 김준형, 「서부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와 지배층의 대응」, 『경상사학』 7 8합집(1992), 84쪽. 344) 위와 같음. 345)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