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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를 독공하다. 국말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출세를 단념하고 입산 수도하기 위하여 처남 류용수와 더불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다. 스스로 깨달은 바 있어 동학에 입도하여 이태만에 향리에 돌아와 고창군 성송면 양곡리에 도소를 마련하고 호남의 대접주로 명성을 떨치게 되다. 갑오년에 이르러 전봉준 선생의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혁명론에 뜻을 같이하여 고창군 공음변 구수리에서 많은 포하의 동학농민군을 소집하고 3월 백산 봉기를 지휘하다. 또한 같은 해 9월의 삼례봉기에 선생은 나주에 머물며 후방을 맏아 침략 일본을 무찌르기 위하여 거족적인 항전을 벌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에서 피체되어 1895년 을미 음 3월 30일 서울에서 최후를 마치니 선생의 향년 35세라. 아울러 선생의 제 익중 족질 여옥 처남 류용수와 더불어 여러 종족이 희생되다. 묘는 향리 음성동 서록 석현 임좌에 초혼장하다. 배 고흥류씨는 기린의 여라. 철종 6년 을묘 음 4월 일정읍 현금 북리에서 태어나 규범으로 알려지다. 1911년 임자 음 12월 6일 향년 58세로 졸세하니 선생의 묘에 합폄하다. 자는 병두 성선 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