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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고 민심은 이반되어갔다. 이에 학생들은 1960년 4월 19일을 기해서 맨주먹을 불끈 쥐고 부정선거 다시하라 이승만 하야하라라는 구호를 목청껏 외치며 거리를 누볐도다. 독재자의 하수인이 된 경찰은 민주학생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으며 학생들은 맨주먹이나 돌맹이로 맞서다가 쓰러져 갔다. 우리의 이기태(李基泰. 1937~1960) 열사는 이 민주대열에 앞장 섰다가 의로운 피를 뿌리고 목숨을 바쳤다. 이기태 열사는 경주 이씨 국당공 후손으로 아버지 이동표(李東杓) 어머니 김정연(金丁連) 사이에 외아들로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에서 태어났다. 열사의 나이 일곱살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여의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청상의 어머니는 날품 행상으로 어린 아들의 학비를 조달했고 열사는 비범한 자질과 근면으로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열사는 무주국민학교 무주중학교 대전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어 서울 경희대학교 법대에 진학했고 4.19 당시 위 대학 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를 이끌고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구국의 함성을 외쳤던 것이다. 아아 흉탄은 열사의 표적으로 날아왔고 열사는 선혈을 뿌리며 민주의 제단에 몸을 바쳤다. 열사의 희생은 바로 이 민족의 위기에 처했을 적 용감히 떨쳐 일어섰던 학생의 영원한 모범이 되었고 이 나라 통일과 민주주의의 노둣돌이 되었다. 이기태 열사의 유해는 당시 열사가 자란 고향 마을에 안장되었으나 1993년 8월 31일 서울 수유동 4,19 묘지로 이장하였다. 새 정부가 군사정권과는 달리 4.19를 혁명으로 규정하고 열사들의 묘지를 민족의 이름으로 기리자는 뜻에 따른 것이다. 열사의 시신은 고향땅을 떠났으나 열사의 영혼은 외롭게 고향의 하늘가와 언덕을 맴돌 것이리라. 이곳에 영동 무주의 유일한 4.19 희생자인 이기태 열사의 추모비를 세워 열사의 외로운 넋을 위로하며 또 열사의 민주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후배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1996년 4월 19일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이이화 글 짓고 효봉 여태명 글씨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