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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라는 천하제일 명당이라고 전해 오는 전통의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예로부터 삽천미륙(揮天弼動)이 영세소립(B英世얹立)한 듯하다는 전설이 증명하듯이 전통적으로불교가 번성하였던 마을이다. 백제 침류왕(林流王) 원년(元年)에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院尊者)에 의 하여 불교가 천래된 이후 다음 해인 침류왕 2년에는 수도인 한산(漢山) 에 절을 지었따고만 전해 올 뿐 정확한 위치비정(位置比定)이 없이 『삼 국사기』에 기론되어 전해 오는 상황이다. 율리에서 분명하게 전해 오는 사실은백제침류왕은불교를받아들이고불교에귀의(歸依)하여전파할 열명의 스님을 임명하였는데 그스님들은 백제 전역에 흩어져 불교를 전 파하였다.율려에처음절을지은스님이 열분중에한분이었다고전해 78 오고 있다. 영장산(靈長山) 아래 지금의 절골에 절을 세우고 설볍(說法) 을 전파하였는데 위례성(함禮城) 인근 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백제전역 향토 문화층 서 @ 돌 마 마을지(T ) 에서 많은 사대부중이 몰려들어 처음에는 절이 부흉하였는데 차츰 능력 없이 얻어먹으려는 빈곤층의 사람들이 수 없이 몰려들어 절의 재정이 빈 곤하여지자 주지스님은 구황식품(救뽑食品)인 밤나무를 많이 심게 하여 몇 년 후부터눈 밤나무가 잘 자라서 많은 밤을 수확하게 되어 궁핍을 변 하기 시작하자 이웃 마을들도 모두 다투어 밤나무를 심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율동에서부터 한주동까지의 산자락이 모두 밤나무 숲으로 뒤덮 이자밤나무二l늘마을이라는뜻으로율목음촌(棄木陰村)이라는말이 생 겨났다. 그 후에 세자궁이 있던 지금의 창곡동은 율목리(票木里)로 불리게 되 었고 금광통(金光洞)이나 단대동(升향洞) 일대는 음촌리(陰村里)로 불리 게 되었다. 율리의 명성은 너무 대단하여 지금의 여수동 전주이씨 문중 이나 도촌동에 선대 묘를 쓴 고성이씨 문중의 족보(族諸)에 가치곡 율리 (加週양票里)라는 마을 명칭이 나오는 것은 이 지역 부근의 이름이 율리 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는사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번성으로 이어졌고 미록부처님을 모신 율리가 잘 사는 축팍받은 마을로 .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