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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下) 이 기옥뿐이다. 한산 이씨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었으며, 목재 나 지은 수법으로 보아 19세기 말 건물로 추정된다. 비 깥마탕에 접한 - 자형 문껏 F채 뒤에 「자형 안채가안마당을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口 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 뒤로는 널찍한 뒷미-당이 흙 담장에 둘 러싸여있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 1칸 반 건넌방과 4 칸 대청, 2칸 안방을 일 렬로 배열하였고, 안방 앞에서 꺾여 부엌과 광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 는반침이 설치되어 공간의 효용도가높다. 문간채는6칸규모를가진 초 가인데 가운데에 대문이 있고 오른 쪽에 온돌방이 있다. 중앙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에 밀집한 아파 트군과 좋은 대조를 이푸고 있는데, 집주위에는마을어귀에있던큰느티니 무와연못,정자터판이있다. 5-4. 정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경기도 문화재자 료 제84 호인 청주한 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는 분당 구 율동 산 2-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도비(神道뼈)는 왕이나 고관 퉁 의 평생업적을 ι기록하여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 는 것으로, 이 비는 조 선전기의문신인문정공한계희선생의공적을기리고있다. 한계희(1423∼1482)는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솜문원 정자 를 시작으로 벼슬 길에 올랐다. 세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으며, 예종과 성종 때에는 두 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벼슬이 우찬성에까지 올랐다. 조선 전기의 명문가였던 집안 배경과 더불어 그가 지닌 학식과곧은 성품 역시 그 바탕이 되었고, 주위로 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푹은 후에는 ‘문정(文靖)’ 이바는시호가내려졌다. 선생의 묘 아꽤쪽에 자리한 비는사각받침돌 위로 비몽 을 세우고 머릿 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전기 당시의 위패 형식을 하고 있다. 받침돌은 윗면에 높직한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으며 머릿돌은 연꽃이 엎어져 있는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