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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 下) 인다.돌마면에서 경안장을보기 위해서는분당구율동과광주읍직리를 잇는 곧은골 도l 개[直里視, 長視, 장고개, 票視]를 넘어야 하눈데, 이 고갯 길은 조선 초기 왕의 능행로(陸幸路)。]7]도하다. 『 성종실록』 2년 10월 8일 “임금이 영릉(英陸)에 배알하려 여주에 거퉁 하니, 백관이 뚱인문 밖에 나가서 대가(大罵)를 전송하였다. 광주의 율현 (票|現) 뱃가에서 주정(畵停)하고 저녁에는같은고 을 낙생역 앞들파오 달에서 머물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왕면 사람들은 산성장이나 송파 장을, 낙생면 주민들은 산성장이나 용인장 혹은 안양시 호계동 지역의 군포천장 을보는데큰불편이 없었다. 이 러한 장시망은 낙생장 소멸의 주변 여건이기도 하였으며, 이후 1925 년 이른바 ‘을푹년 대홍수’ 로 인하여 당시 송파 일대의 마 을-과송파장터 가 모두 침수 · 파괴되면서 송파 장터가 크게 위축되었는데 비슷 한 시기 에 분당장이 새로 생기면서 낙생장은 다시 부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 다. 더구나 즉 일제는 1914 년 시장규칙을 반포하면서 모든 장시의 개설 을 허가제로 규정하였으므로 낙생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졌 다고 짐 작된다. 그리고 돌마면의 분당장터가 형성되는 시기에 남한산성 안에 있던 광 주군청이 경안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안리가 새로운 행정 · 교통 · 인 구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성리 인구가 줄 어들고 산 성리를관통하던 대로도 경안리에서 바로 지금의 43번 국도를따라 하남 시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원래 광주 읍내장 격인 성내장은 1923∼1926년 사이에 소멸하고 1930년대부터 경안장이 광주 내 가장 큰 장터가되었다.산성장소멸과비슷한시기에신설된분당장은산성징낸 이었던중부면일부와낙생 · 돌마면지역을시장권 내로포섭하였다.장 세는미미하여 1931년 1년거래액이 1만 9천엔에불과하였지만, 지역내 소시장(小市場)으로 일제시대 내내 성남에서 유일하게 명백을 유지하였 다.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