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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지역에 맨 처음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66년 대왕면 지역이었고, 이어서 1969년에 수진리 하천변에 신풍제지공장(현재 삼부아파트 자리) 이 가동되면서 전기가 들어왔는데, 돌마지역은 1973년에 이른바 ‘농어 촌 전화(電化)사업’ 이 시행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주민들 i의 생활은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고 농산물은 주로 분당장과모란장을 뚱해서 해결 하였으며,대량의 농산물과가축은광주의 경안장이나서울의 왕십리중 앙시장,천호동시장이나청량리시장등을이용하였다. 당시 서울로의 진입은 천호동의 광진교가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이후 큰 변화 없이 지속되다가 1960 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가닥치 게되었다. 한편돌마지떡의 교육 여건은 1935년 4월에 개교한돌마공립보통학교 가 고작이었고, 중퉁 교육기관으로는 1953년 1월 23일에 양영고동공민 학교(현 양영중학교 전신)가 설립되었다가 1963년 2월에 폐교되었으며, 다시 1968년 3월 1일 양영상업고퉁학고까 개교하였다. 돌마초퉁학교는 6.25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며 교실 없는 맨바닥 나무 밑에서 수업이 이루 어졌다. 『조 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 에 보면 1935년에 돌마보통학교에는 일본인 宮뼈武歡과 김웅배(金應培)가 훈도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37년에 와서 ;휠뼈武式은 월6o, 이백규(李百珪) 훈도(뢰||導)가 월42의 보 수를 받았고, 장덕성(張德成)이라는 훈도 1명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1938년이 되면 학교 이름이 돌마심상소학교로 바뀌고, 앞의 세 명 외에 김화석(金華錫)이란 이가 돌마심상소학교 위탁교원(爛託敎員)으로 부임 하였는데 월수당은 45였다. 1939년에는 일본인 교사가 河野똘雄으로 바 뀌고그의 월 보수는 70, 張德成은 월 6o의 보수를 받았던 것오로 기록되 어 있다. 그러다가 해방 직전인 1941년에 학교 이름을 돌마국민학교로 바꾸었다. 해방 이후 『 대한민국직원록 』 에는 1952년에 박관서(朴冠總)라는 분이 27 돌마지역의 역사와 문화 유 늦승 즈 ”}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