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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천(李輔天, 1714∼1π7) 휘(譯)는보천(輔天)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글 읽기를좋아하는호 학으로 일과를 소!아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학자이 다. 평생에 심혈을r 기울인 자신의 문집인 『안재집』(安爾集)이 전해 온다. 묘소는 율동 산 57번지에 유인(補A) 미상씨(未詳民)와 합조묘(合% 훌)이다. 191 세거성씨와 인물 한동열 이양천(李亮天, 1716∼1755) 휘( 譯)는 양천(亮天)이다. 영조(英祖) 25년 3월 16일 문과장원(文科밤 元)을 하여 전시(願試)에 웅시자격이 주어졌다. 이어 치러진 첸시(願試) 에서도 급제하였다. 동년 8 월 20일에 정육품(正六品) 승의랑(承議郞)이 되어 사간원 정안(司誠院 正言)에 보임(補任)되고 영조(英祖) 26년 11월 4일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橫)이 되었다. 동년 12월 19일 정오뜸(正五品) 통덕랑(通德郞)으로 승차(團差)하여 세자시강원 문학(世子待講院 文學) 이 되었고 영조(英祖) 27년 2 월 27일에는 다시 부수찬(副”찢橫)이 되었다 가 동년 6월 15잎에는 겸(暴) 우초닫득(右贊讀)이 되었다, 동년 8 월 4일에 는 겸(짧) 사서(司書)가 되었다가 동년 10월 27일에는 홍문관 교리(弘文 館 校理)가 되었따. 동년 10월 29일에는 영조(英祖)에게 올린 상소문(上 統文)이 비화되아 영조(英祖)의 노여움을 사서 절해고도(總海孤島)인 흑 산도(黑山島)로 귀OJ: 을 갔다. 영조(英祖) 29년 6월 30일에 방띤(放免)이 되어 신원(뼈免)이 되었다. 정조(正祖) 3 년 4 월 17일에 정사품(正四品) 조 봉대부(朝奉大夫)로 승차(陸差)하여 세자시강원 필선(世子待講院 弼善) 이 되어 환로(富路)에 복귀하였다. 동년 6월 1일에 정삼품당상관(正三品 堂上官)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차(陸差)하여 찬집 당상관(籍輯 堂上 官)이되었 다. 묘소는 율동 산 ·57번지에 숙부인(淑夫A)과 합조묘(合%훌)이다. *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