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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 성종 10년에는 광주의 별호를 별호는 회안(堆安)이라 하였고, 14 년(995)에 10도」를 설치할 때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 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 2년에 거란이 쳐들어와서 궁궐을 불태웠을 때 임금은 광주 지역으로 행차를 하였고, 두 왕후를 잃었다가 요탄역( 觀韓 )에서 다시 찾아사흘깐머물렀던곳도역시성남지역이었다. 그리고 돌마면 지역은 인근 세촌면, 중대면, 대왕면 지역과 더불어 수 진궁(壽進宮)에 소속된 토지가 많았으며, 1901년(광무5) 3월에 광주부 (부윤 김필현)에서 만든 세촌면 수진통과 돌마면 임의실(任꿇室)의 〈영 창대군방(永昌大君房) 전답(田짧) 및 도전(體田)에 대한 양딴(量案)〉에 는 영창대군 위토(位土) 전답(田짧)에 대한 두락수와 농사를 짓는 작인 (作A)에 대하여 상 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이매동 지역에 영창대군의 위토가 있었음달보여준다. 여기에는 각 필지마다 시작인(時作A) . 지목 · 두락 · 토지의 등급이 기재되었고, 도전에는 도태(體太)가 두(斗)단위로 기재되어 있다. 전체 답(짧)은4석 3푸로표시되어 있다. 1900년경의 훨마지역에는 그 당시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금 에 대한 부담감이 과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각군 소장(訴狀)」 에는 광주군 돌마면 하2리 안수복(安守福)과 김죽산(金竹山) 퉁이 1900 년 12월에 역전(羅田)에대한감세(減現)를요구핸소장을걱흘리자이에 대하여 1901년 l월 5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준납(i歸며)하라는- 결정을 한 사실이 있다 역시 뒤이어서 1901년 1월에 광주 돌마면 역전 작인(作A) 인 맹돌남(굶突男) 등이 파역(罷羅) 후 양전 과정에서 중액된 도조를 감 해 달라는소장을 제출하였는데, 여기에는 김팔손, 서순손, 안수복, 서사 문, 원지월, 이병복, 손구월, 맹덕돌, 김시흥, 한부전, 한안성, 이산창, 윤 용옥, 이관도등 여러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된시기의 성남지역에서는행일운동이 양. 21 돌마지역의 역사와 ""'" 화 유 늦승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