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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대부(資憲大夫) 지돈령부사(知敎寧府事)를 지낸 할아버님인 율헌(票 幹) 한명욱(韓明閒)이 환로(술路)에 나가되 높은 벼슬을 탐(食)하지 말라 는 당부(當付)로 인하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진사(成均 館)進土)가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짧~)하여 향리에서 학문에만 열중하며 문중-서당(門中書堂)에서 후학을가르치는데만 힘썼다. 그러나 단명(短命)하여 40대 중반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묘소는 율동 산 9-1번지에 숙인(淑A) 진주(쯤州) 강씨(姜J~)와 임좌(王 坐)에 합조(合뾰)이다. 향토 문화층서 @ 한숙(韓滿, 1691∼1708) 휘(譯)는 숙(潤)이고 자(字)는 달부(達夫)이다. 어려서 부친(父親)을 잃 고, 숙부(淑父)에게서 학문교육(學問敎育)을 받아 과거(科學)를 보았는 데 문과등과(文科登科)를 하였으나 불행(不幸)하게도 후암동(J享岩洞)에 있는 숙부(淑父) 집에서 천연두병(天然찮病)을 얻어 환로(富路)에 못나 가고 끝내 천연두(天然찮)로 후사 없이 사망(死亡)하여, 명문반가(名門 班家)의 동료와 선후배들이 그의 재능(才能)을 안타까워 하였다. 배(配) 광산(光山) 김씨(金&)가 청상(춤爛)의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끝 내 수절하며 펴눈물어린 정성으로 묘표(훌表)를 세워 인근(|憐近)의 반가 (班家)에서 열부(烈據)라고 극찬(極讀)하였고 세간(世間)의 찬탄을 받았 다고전해온다. 묘소는 율동(票洞) 선영(先瑩) 산 9-2번지 내에 유인(補A) 광산(光山) 김씨(金民)와 ;건좌(乾坐)에 합조(合%)이다. 172 돌마 마을지(下) 한종백(韓宗伯, 1611∼” 휘(譯)는 종백(宗伯). 벼슬은 종육품(從六品) 병절교위(秉節校텀)로 충 좌위(忠住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나 인조(仁祖) 14년 이십공신(二 十功닮) 회맹(會盟)에 참여(參與)하였다. 증직(體職)으로 정삼품(正三品) 형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