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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세거성씨와 인물 ·한동열 의었을 때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지내다 가시묘를이유굶사임(蘇任)하였다. 성종(成宗) 20년에는 의금부(義禁府)경력(經力)을 지내고 떤산(演山) 3 년 1월 4일에는 전주판관(全’·l'I判官)을 지낼 때에 외사촌형인 여자신(呂 엽信)이 전라도판찰사(全羅道觀察使)로 부임(합任)하여 사촌간(四#間) 이므로 상피(相避)함을 상소(上해)하자 교체되어 내직으로 들어왔다. 연 산(藏山) 10년 4월 17일에는 조지서, 정성근, 구성, 최숙근의 논죄(論罪) 때에 어전토론(微前討論)에 참석하여 정의의 논리로 의견을 개진하여 주 위로부터 올곧다는 칭송을 들었다. 중종(中宗) 2년 9월 3일에는 강원관 찰사(江原觀察使)가 “원주목사(原州救使) 한사개(韓士介)는 청렴 근실 (動實)하여 참다운은혜를 베풀기에 힘을다하므로한고을백성이 모두 생업(生業)에 안정되고 있는데 이제 체임(週任)을 당하였으니 그를 다시 유임시켜 달라”고 올린 장계(狀량)로 인하여 원주목사(頂州救使)에 다시 유엄되었다. 고급관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선정치민(善政治民)을 잘하여 중 종(中宗) 12년 12월 13일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도총부(五衛都總 府)부총관(副擔짤)을 지낼 때에 진(陣)을 풀면서 승정원(承政院)에만 보 고하고 병조(兵1홈)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죄대상(論罪對象)이 되기도하였으냐,중종(中宗)의 명으로불문(不問)에부쳐지기도하였다. 후일에 영흥부사(永興府使)와 해주목사(海州救使), 광주목사(廣州收使), 진주목사(쯤州物使)를 두루 역임(歷任)한 후에 졸(쭈)하였다. 가선대부 (嘉善大夫) 병조참판(兵費參判)으로증직(睡職)이 되었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2-1번지에 정부인(貞夫A) 경주(慶1·M)이씨(李民) 와 신좌(申坐) 합조(合%)이다. 한영(韓永, 1476∼154이 휘(譯)는 영(永)이고 자(字)는 전(傳)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한계희(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