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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 (間言)이 없었으며 평생에 병이 많아서 휴가를내려준것이 반을차지하 였으므로 마침내 태석(台石)에 오르지 못하여 물론 애석하게 여기었다.” 고기록하고있다. 성종 14년(1483) 강희맹(姜希굶)의 졸기(쭈記)중에 세조가 말하기를, “내게 제일의 신하가 셋이 있는데 한계희(韓繼禮)는 마묘(微妙)함이 제일이요, 노사신(盧思많)은 활달(짧達)함이 제일이요, 깅-희맹(姜希굶) 은 강명(剛明)함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은 세조가 얼마나 공의 심오한학문의 경지를 연모(戀暴)하였는기를 알려주는 대곽이다. 성종 19년(1488)에 이칙(李則)이 아흰 내용 중에는 “한계희(韓繼禮)는 인물이 고매(高勳)하여 사람들이 모두 정승이 될 것을 기대하였는데 그 대로 있고,,끼콰는 기록도 공에 대한 관료들의 선망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년가?생각한다. 공의 행적이나행장이 기록된 책들중에 절친한친구이던 달성군(達城 君)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필원잡기』(筆짧雜記)와 최항(崔l互) 문집과 구치관(具致寬) 전기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비문이나 실펀의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기재(寄짧)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顆雜 記)에는 ‘상당(上黨) 집에서 문중회의가 열렸는데, “일통이 모두서평(西 平)은 나이가 높아졌는데도자기를 너무 박하게 취급(取板)하여 그 의복 과음식을소꽁히 함은보는사람들로서 미안하기 짝이 없으니 처리방법 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자 상당(上黨)은 “이는 나의 잘못이 다” 라고 하고 아이를 불러서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첫째, 서평(西平)의 청백(淸白)하고 간이(簡易)한 덕을 쓰고 둘째, 문중에서 받들어 모시지 못한 과오를 쓰고 끝으로 자그마한 물건이 마음에 맞는 것은 못 된다고 써서 홍인문(興仁門) 밖 고암(鼓岩) 아래에 있는 논, 밭 열섬지기(約四萬 t平)를 드렸는데 서평(西平)이 굳이 사OJ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상당(上 黨) 이하 제족이 일제히 받기를 간청하여 부득이 받기는 하였지마는 폭 (福)이 넓은 웃음 가운데 한결같이 조심하여 불안히 여기는 모습이 떠올 150 문화층서 @ 돌 마 마을지(下) 앓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