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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기묶으로는 1906년에 만들어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 람』 에 돌마지 역은 갈현리(萬뼈里), 옹점리(寶店里), 여쑤ξ(麗水洞), 오 야소동(챔野所洞), 하탑동(下搭洞), 상탑동(上협洞), 이매똥(二梅洞), 통 로동(通路洞), 양현리(陽視里), 둔서촌(趣書村), 율리(票里), 분점리(益店 里), 당우리(훔爛里), 수내촌(數內村), 정자동(亨子洞)으로 꾀어 있다, 이 때 하대뭔(下大院)은 돌마면이 아닌 세촌면에 속해 있었다 하대원 이 돌마면으로 편입된 것은 1914년에 이르러서 였다. 즉 『新舊對照 朝蘇 全道 府혐B面별洞 名稱-寶』의 기록을 보면 갈현리(홉l現里), 도촌리(島村 里), 여수리(麗水里), 야탑리(野搭里), 이매리(二梅里), 서 현리(書視里), 율리(票里), 푼당리(益I훔里), 수내리(數內里), 정자리(亨子里)와 세촌면 16 의 하대원(下大院)을 포함하여 이 때부터 하대원이 돌마띤에 속하게 되 었다. 이 때에 분당이라는 지명이 분점리와 당우리를 합쳐서 생겨난 것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 下) 이다. 돌마(突馬)따는 땅이름의 발생 유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토지공사 토저박물관에서 펴낸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에는 병자호란 (며子胡亂) 때 근왕병을 이끌고 온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 : 1583∼ 1661)가 청나바 군사와 싸워 크게 패하였는데, 이때의 격첸에서 주인을 잃은 말떼가 씨곳 산골짜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하여 이 일대를돌마 면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 한 설이다. 이미 그 이전부터 돌마라는 지명이 문헌기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불려 진 이름이 확실하다. 돌마(突馬) 지명에 대해서는묘비문, 묘지명, 신도비 퉁의 기록에 어떤 인물의 사후 에장사지낸묘지의위치에대한확인으로서다수전해지고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인물인 이원(李原)의 문집인 『용헌집(容幹集)』에 ‘돌마라는땅이름이불려지고있었음을보 여주고 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태어나 조선 세종 11년(1429) 6 월 19일 62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원(李原)이 여산(碼山)에서 별세하자 9 앓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