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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1567년(明宗22, T띠)에 출생하였는데 미모가 뛰어나게 달랐 다. 그러나 병약하여 창롱과 영롱, 집현전 참봉을 지내고사옹원 참사, 종 부 직장 등을 거쳐 통례원인의(通禮院引懷)를 지냈으니 , 건강상 부득이 한직(閒職)을 택했던 것이다. 1617년(광해9)에 51세에 인천현감으로 나 아가 3년을 지내고, 1619년(광해11)에 숙환이 더욱 심하여 관아에서 졸 하니 향년 53세였다. 성품은 “자상하고, 온후하며, 몸가짐을 조심하고, 겸손하며, 관아에서는 청렴 공정하고, 업무에 정성을 다하였다”고 전한 다. 배위(配位)늪 숙인(淑A) 원주원씨(原州元民, 1567∼1“2)이며, 장지 (賽地)는 원주의 노림이었으나, 1663년 4월 12일 지호t곡(지정면) 안현 서 126 일리 을좌(ζ坐)로 천묘(選훌)하였다가, 현재는 2000년 4원 4일 서현동 산 63-1 선영인 장헌공(莊敵公) 묘역에 이장(移舞)되었다. 하 。토 문화층서 @ 한수겸(韓守짧, 1570∼1622) 휘(譯)는 수겸(守議), 자(字)는 중익(↑며益)이다. 좌의정(左議政) 시(說) 장헌공(莊敵公) 한효순(韓孝純)의 차자로, 1570년(宣祖3)에 출생, 1622년 (光海14년)에 향년(享年) 53세로 졸(쭈)하였다. 벼슬은 통황대부(通訓大 夫) 광흥창수(廣興용守)를 지내고 임진왜란(王辰優亂) 때에는 종묘(宗 關)를 호종(룸從)하여 세자(世子)를 보호하고 북도(北道)와 호서등지(湖 西等地)로 피난을 하여 위험을 방비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추충 정난 익대 호종공신(推忠 靖難 翊載 尾從 功昆)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更費判書)겸(暴) 의금부사(義禁府事)가 증직(體職)되고 서릉군(西陸君) 에봉(封)해졌다. 배위(配位)눈 정부인(貞夫시 파평윤씨(彼平尹民)인데, 표소는 피주시 교하(交河)면 아동(牙洞) 해좌($"_坐)이며 배위(配↑立)는 축싹(표坐)로 기 록되었으나, 쭈에 지형변화가 극심하여 확인이 어렵다. 희유(橋有)한 공 의 영정(影뼈)이 가전(家傳)되고 있다. 제단(察樓)을 2003년 10월 24일 장 돌마 마을 지( 下) 영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