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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覺敎를 創立하는 한편 三藏譯會를 만들어 經典의 우리말 飜譯에 專念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는 日帝의 馬脚을 豫見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의 著述로는 禪門要旨, 歸源正宗을 비롯하여 心造萬有論, 修心正路, 팔상록, 大覺敎儀式, 大覺敎歌集, 불문입교문답, 覺海日輪, 晴空圓日, 修心論, 釋迦史, 極樂路程記, 佛敎唱歌, 大覺源流, 敎理大典, 大覺敎兒童敎科書, 臨終訣, 梵網經演義, 吾道의 眞理, 吾道는 覺, 龍城禪師語錄 等이고, 譯書로는 신역대장경, 首楞嚴經鮮漢演義, 卍金毘羅經, 覺頂心觀音正士摠持經, 大方廣圓覺經, 詳譯科解金剛經, 八陽經, 조선글화엄경, 朝鮮語楞嚴經, 六祖壇經, 大乘起信論, 灌頂伏魔經, 覺說梵網經, 鮮漢譯大方廣佛華嚴經, 六字靈感大明王經, 千手經, 지장보살본원경, 鮮漢文譯禪門撮要, 金剛三昧經, 六字大明王經, 川老金剛經 等이며, 論說로는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活句參禪萬日結社發願文, 日本式犯戒生活에 대한 建白書, 中央行政에 대한 希望, 禪話漏說 等이고 雜誌로는 佛日과 無我 等을 發刊하였다. 한편 스님은 持戒에 있어서도 嚴正하였으니 그 持戒思想의 根源은 百丈의 淸規에 있고 實踐은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을 이어 받아 禪農一致를 主唱하였다. 一九二二年 亡命地인 延吉市 明月村과 鳳寧村 一帶에 田地 七十餘晌을 買入하여 大覺敎堂을 設立, 禪農一致의 修行을 몸소 본 보였다. 그러나 總督府의 諜者로 投入된 서울 鐘路區 天一堂 漢藥房 從事員인 安某는 計劃的으로 스님의 上佐가 되어 두터운 信任을 얻은 다음 農場을 經營한 지 三年만에 賣却 逃走하여 스님의 뜻은 挫折되고 말았다. 그러나 스님은 一九二七年 慶南 咸陽郡 栢田面 白雲理 白雪山에 三十餘町步를 確保하여 華果院을 設立하고 果樹 一萬餘 株를 심고 다시 禪農佛敎를 일으켜 韓國禪修行의 새로운 局面을 열었으니 日帝植民治下의 劣惡한 寺院經濟를 극복하며 나아가서 民族이 經濟力을 向上시키므로써 나라를 回復하는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亡命地로부터 돌아온 直後인 一九二四年 四月 二十八日 大覺寺에서 看經次 左齒間으로부터 五色이 玲瓏한 舍利 一顆가 出現하여 三次에 걸쳐 放光하였다. 一九二五年 三角山 望月寺에서 活句參禪 萬日結社를 創設하고 날로 쇠퇴해 가는 以戒爲師의 律風振作을 위하여 佛工인 韓鳳憐에게 玉石으로 觀音 및 地藏菩薩像과 戒牒板, 法王之寶, 千華律脈戒師之印, 防僞之印 等을 새기게 하고 觀音 및 地藏菩薩像 前에서 萬日祈禱를 奉行하면서 禪律一致를 提唱하고 그해 十月 十五日 海印寺 金剛戒壇에서 如法한 授戒法會를 開設하였으니 이후 스님으로부터 禪法과 戒法을 받은 제자가 무려 數萬에 이르렀으니 末世之正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特히 우리 固有의 傳統 文化를 抹殺하고자 하는 日帝 植民政策의 一環으로 韓國佛敎의 傳統과 思想을 日本佛敎化하고자 僧伽의 帶妻食肉과 飮酒率家를 暗暗裏에 助長하는 朝鮮總督府와 日本內務省에 맞서 一九二六年 五月과 九月에 各各 建白書를 내어 佛敎의 根本精神에 立脚한 韓國佛敎의 傳統을 지키고자 努力하였으나 日帝에 의하여 이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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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님은 斷念하지 아니하고 平生을 通하여 期會가 있을 때마다 帶妻率家와 飮酒食肉을 비롯한 온갖 犯戒의 잘못을 指摘하고 退色變質되어가는 韓國佛敎의 一大覺醒을 促求하였다. 스님은 平素敎育을 通하여 겨레가 깨우치지 못하면 佛敎의 中興도 祖國의 光復도 至難하다는 信念을 가지고 一九二八年에는 大覺日曜學校를 一九二九年에는 大覺敎堂에 修禪會를 開設하여 民衆敎育에 힘썼으나 一九三四年 日帝는 大覺敎의 活動을 彈壓하여 一九三六年에는 不得已 大本山 梵魚寺 京城布敎堂으로 改稱하였으나 一九三八年 大覺敎 創設 十八年만에 이를 解散시키므로써 스님의 活動은 事實上 봉쇄당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이에 屈伏하지 않고 一九三九年 朝鮮佛敎 禪宗叢林으로 改編하여 活動을 再開하였으나 無常迅速하고 時不待人하여 마침내 一九四◯年 二月 二十四日 서울 大覺寺에서 門徒들에게 涅槃을 豫言하시고 沐浴한 다음 架裟를 입고 端正히 앉아 入寂하니 世壽는 七十七歲요 法臘은 六十一歲였다. 臨終에 앞서 스님은 내가 오늘 涅槃에 들고자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거나 孝道를 行하려 하지 말고 오직 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라는 法句만을 외우라고 遺敎하였다. 이때 弟子가 묻되 스님은 어느곳으로 向하여 가시렵니까 하니 匏花穿籬出하여 閒臥麻田上이라는 臨終偈를 남겼다. 一九四一年 海印寺 西麓 弘濟庵 東便에 韓龍雲禪師가 지은 祖師의 舍利塔碑를 세움과 同時에 塔廟를 侍護할 龍塔殿도 함께 建立하였다. 그러나 그 當時는 日帝治下였기에 스님의 生涯를 赤裸裸하게 摘記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 하던 次 門徒와 스님의 遺志를 받들어 一九六九年에 設立된 財團法人 大覺會의 理事長이며 스님의 마지막 生存한 受法弟子인 慈雲老師의 發願과 大覺寺住持 佛心道文 和尙과 立碑幹事인 無心普光師主의 心血을 기울인 努力과 모든 門徒들의 合力으로 새롭게 碑碣를 세우게 되었으니 實로 스님 가신 지 半世紀만의 佛事임에 어찌 기쁘지 않으랴!! 感泣하면서 敢히 祖師의 行狀을 撰하는 바이다. 以上 祖師의 偉業倬跡을 偈頌으로 讚揚하노라. 悠久한 韓國佛敎 千七百餘年 동안 數많은 高僧大德 民族의 횃불되어 龍城堂 大祖師도 宿世의 願行따라 實相山 기슭아래 童子로 應身했네 出衆한 學童生活 四書를 涉獵하고 竺敎에 뜻을두어 海印에 出家하여 三藏에 精通하고 密旨를 大悟한後 文賢의 智行으로 이江山 살펴봤네 白衣의 檀君子孫 日帝에 짓밟히고 뺴앗긴 祖國山河 곳마다 피멍인데 兄弟는 굶주리고 姉妹는 헐벗으니 이슬픔 이아픔을 그누가 알겠으랴 이民族 이겨레를 가슴에 쓸어안고 解放의 그날까지 이한몸 사루리라 한손에 삽을들고 한손에 藏經번역 徹夜를 지새우니 落淚가 江이된다 사무친 解放一念 佛菩薩 感應시켜 塔洞의 獨立宣言 民族의 代表되고 西大門 監獄속에 囹圄의 五百日이 光復의 氣運되어 祖國은 獨立됐네 世緣이 임박하니 門徒를 모아놓고 위없는 大涅槃은 둥글고 常寂하다 慧命을 당부하고 微笑로 坐脫하니 영롱한 五色舍利 人天의 福田이네 大祖師 願行속에 宗團은 바로서고 佛法의 深奧함을 누구나 쉬배워서 達磨의 五葉처럼 江山에 滿開하니 크신뜻 거룩함은 後學에 龜鑑되네 東山에 달이뜨니 西山에 해가지고 南山에 說法하니 北山은 點頭하네 寂光殿 毘盧遮那 華嚴을 常設하니 紅流洞 秋溪聲이 伽倻山 吐해낸다 佛紀二五三七年(一九九三) 五月 八日 門孫 伽山智冠 謹撰(문계 가산 지관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