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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이근원 선생 추모비 이근원(李根元, 1840~1918) 선생은 1840년(헌종 6) 11월 12일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금의(錦衣)에서 부친 노기당 이양흡(李養翕, 1809~1878)과 모친 전의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문중(文仲), 호는 금계(錦溪)·배복와(坏墣窩)이며, 성종의 11번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의 11세손이다. 선생은 10세에 외숙 이풍회(李灃會)에게 글을 배웠고, 1866년(고종 3) 27세 화서 이항로(1792~1868) 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1868년(고종 5) 화서 이항로 선생이 서거한 후에는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과거공부도 전폐하고 도학공부에 전력하였다. 또한 화서학파의 기본정신인 도학과 의리정신, 그리고 위정척사사상이 투철하여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홍재구·유기일·박장호 등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렸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다. 1884년 변복령이 내리자 「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을 지어, 의복이 바뀌면 정신적 가치기준도 달라진다고 하면서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선생은 11월에 용문산에 들어가 유중악·유홍석·유봉석·이소응 등과 거의할 것을 논의할 때에 참석하였다. 1906년 친일파 정혁선이 "금계가 의병을 일으켜 '일진회'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모함을 하여, 여주 헌병대에 구금되기도 했었다. 그 후 1910년 경술국치 때에는 일제가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다 헌병 분견소에서 1주일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선생은 금리 정사(精舍) 동쪽에 일직당(一直堂)을 지어 주자를 모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사현(四賢)을 추배하고 평소에 5현을 존경하고 사모하고 절함은 물론, 매년 3월에는 강회(講會)를 실시하여 학풍을 진작시키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선생의 저술에는 「행자설(行字說)」·「자경문(自警文)」·「지경설(持敬說)」·「명덕설(明德說)」·「신언설(愼言說)」·「삼명설(三命說)」·「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출처설(出處說)」 등이 있고, 편서에 「송서략선(宋書略選)」과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금계 이근원 선생의 추모비는 2009년 8월 15일 지평의병정신선양회가 양평군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으며, 비신이 2.1m 정도 규모, 비문은 약 2,400여 자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벽계서당 훈장 정석현이 짓고, 두전(頭篆)은 사단법인 화서학회 이사장 이종익이 썼으며, 교정은 정삼현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