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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항상 착한 마음으로 살고 남을 해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며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가족간에 화목하게 지내라고 가르쳤다. 공이 피체되어 징역살이를 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어린 아들을 업고 가끔 상경하여 위로하였고 정안수 떠놓고 남편이 무사귀환하도록 빌기를 매일 한결같이 하였다. 경인년 동란 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나온 김병현의 모친이 3일을 굶어 기진맥진하여 집에 도착했다. 당시 전란 중이라 가족 친지 25 식구가 한 집에서 거친 맥반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이 여인은 기아상태에서 허기를 면하려고 냉수에 간장을 넣어달라고 했는데 이 딱한 처지를 알고 친절히 맞아 한 식구처럼 밥을 대접하여 기력을 회복하였다. 이 여인은 감동하여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시 장자 운암이 국민병으로 가서 간질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에 이 여인을 만나게 되어 탕약을 가져오는 등 정성스런 도움을 받아 생환이 가능했던 것이니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또한 내외간에도 금슬이 좋아 자녀에게 모범이 되고 세인의 귀감이 되었으니 이 어찌 현부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경자 정월 26일에 출생하여 계해 3월 21일 졸하니 수는 84이다. 묘는 정배리 남방 중미산하 101번지 미좌원에 합폄하였다. 장남에 인수 차남에 명수를 두었다. 손에 용민 용갑과 이건호 홍종표의 처는 인수의 소생이고 용생 용걸과 이희준 이종원 강성수의 처는 명수의 소생이다. 충효는 국가와 민족의 근본논리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처세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공의 효행과 성현을 존모하는 자세화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생사를 계교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 등은 후세가 본받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공의 장남 운암장이 불녕에게 이르기를 내가 팔순이 넘었는데 죽기 전에 선고의 묘비를 세워드려야 하겠네. 선고의 포창을 자네가 이루었으니 비문도 자네가 써주게라고 하였다. 간절한 부탁을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평소에 공을 알현하고 존경해온 바 불문하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운문화를 참고하여 짓고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