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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117 섬실마을 이춘영 의병장 생가터 표지석을 찾았다. 경기도 양평(楊平)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며 나아가서 일제의 내정간섭을 저지하기 위하여 의병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친우인 안승우(安承禹)와 함께 원주(原州) 안창리(安倉里)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이때 지평감역(砥平監役)인 맹영재(孟英在)는 '동비(東匪)'를 막기 위하여 총을 많이 준비하였다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지평 현감(縣監)으로 출신하게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맹영재는 이미 거의할 뜻이 없었다. 이에 이춘영은 맹영재의 부하 중에 김백선(金伯善)이 전술·전략에 능숙할 뿐 아니라 대의를 위하여 거의할 뜻이 있음을 알고 입진시켰다. 백선은 맹영재가 영솔하고 있던 부하 4백여 명을 영입하여 의병대를 조직하고 원주를 점령하여 수일간 주둔하였다가 제천(堤川)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제천군수와 단양군수, 청풍군수 그리고 충주관찰사 등을 생포하였다. 이때 단양군수의 아들이 일병 수백 명을 청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들을 맞아 단양 장회(長 )에서 접전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지평현감 맹영재는 부하를 빼앗긴 것을 한하여 관찰부와 경사(京司)에 '이춘영·안승우 대역부도(大逆不道)'라는 10자로 보고하고 네거리에 방문을 써서 붙인 다음 그의 부하인 이민옥(李敏玉)을 비밀리에 의진에 파견하여 겉으로는 의병을 가장하고 내심으로 흉계를 품어 장차 의진을 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민옥이라는 자는 이춘영의 친척인 동시에 안승우의 외척이었으므로 그를 믿고 의진 내에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그후 이준영과 서상열(徐相烈)이 의병을 소모하고자 영남으로 향할 때에, 이민옥도 그들을 따라가서 암암리에 포군을 꾀어 풍기(豊基)에서 흩어지도록 유인하였다. 도군무(都軍務) 안승우가 제천에서 군사를 수습하고 이를 영솔하여 이진하고자 할 때 이민옥이 또 간계를 쓰다가 발각되었다. 안승우는 외척관계를 불구하고 이민옥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맹영재와 이민옥 등의 간계로 한때 의진은 곤경을 당하였으나 이춘영과 안승우가 다시 이를 수습하여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이 되어 의진을 충주(忠州)로 옮겼다. 그러나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에 입성한 다음날부터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충주성에서 머지않은 수안보에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관찰사 김규식이 가흥(佳興)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군에 증원을 요청한 바 있어 의진이 입성하던 2월 17일 밤에 충주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충주 의진은 이튿날 아침부터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진은 굽히지 않고 병력을 성벽 밑에 집중 배치하고 반격을 가하니 적병이 무수히 쓰러졌다. 격전은 장기간 지속되었으나 오후에는 적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가흥 방면으로 달아났다. 한편 인근의 많은 의병들이 충주로 모여들고 호응 원조하여 의진의 형세가 크게 떨쳤다. 이때 이춘영은 중군장으로 성중에 있으며 각 군을 독려하고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지금 적의 병참이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으니 물러가서 지킬 수도 없고 나아가서 용병(用兵)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서의 계책으로는 먼저 수안보의 적 병참을 소멸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리고 1대의 병력으로 조령(鳥嶺)의 험지를 근거 삼아 지키면서 전선(電線)을 모두 철거한다면 천리간에 걸쳐 있는 적의 병참들이 머리와 꼬리가 서로 끊어져서, 앞에서는 뒤를 구원하지 못하고, 뒤에서는 앞을 구원하지 못하여 적의 세력이 분단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밖의 온 세력을 끌고, 호남의 풍성(豊盛)한 것을 당기어서 서로 우익(羽翼)을 삼으며, 사면으로 다가든다면 경성의 적을 며칠이 안 가서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획은 좋으나 위태로움이 많으므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는데 2월 23일 왜적 수백 명이 달천(達川)까지 들어왔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이때 춘영은 대장에게 고하기를 "각 영의 장수들이 매일 출전하여 많이 피로한데, 저만은 중군이므로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아서 마음에 항상 불안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출전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겠습니다." 하니 대장이 허락하였다. 여기서 이춘영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워 크게 이겼다. 적병의 시체만도 5, 60이 되었다. 적이 멀리 달아났으므로 일단 군사들을 집합시켰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이춘영은 성밖에 유진하고 대장소에 사실을 보고하기를 승전한 기세를 이용하여 수안보를 진격하겠다고 청하니, 대장소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승승기고(乘勝氣高)한 군사들을 지휘하여 바로 수안보의 적 병참을 진격하였다. 조령 밑에 있는 수안보의 왜병참에 대하여 춘영이 진작부터 관심을 가지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였기 때문에 쉽사리 포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위의 고지를 이용한 의병진에서는 저항하는 적병들을 사살하면서 사면으로 압축하여 들어가니 탄환이 비 쏟아지듯 하고 처절한 격전이 전개되었다. 용감한 의병들은 적병을 보이는 대로 무찌르며 육박하여 들어가니 적진에서는 당황하여 퇴각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때 이춘영이 큰소리로 "적이 지금 달아나려 하니 군사들은 급히 쳐라"고 호령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적들은 이춘영을 향하여 집중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육혈포를 쏘았으나, 총알이 나오지 않았다. 이춘영은 뒤에 있던 홍선표(洪選杓)에게 총을 주며 "이거 보시오, 웬일인지 모르겠소."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은신물로 사용하던 큰 나무로부터 몸이 노출되었다. 적은 그 틈을 노려 총을 쏘았다. 적의 탄환은 그를 명중하여 28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을 위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