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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본관이 경주, 휘는 정제, 자는 성흠, 호는 운파이다. 신라 김씨 왕조의 후손으로 고려 예종조에 문과장원으로 검교태자 태사이신 선생의 25대조 휘 인관, 호 태사공을 중시조로 모신다. 16대조 휘 한, 호 우제공은 조선 세종조에 문과급제, 사헌부감찰을 지내시고 보좌명원종공신에 책록되셨는데 계유정난때 벼슬을 버리시고 남포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키셨다. 조고 휘 광희, 호 정제공은 기호학파의 거유 숙재 조병덕의 촉망받는 제자로 학덕이 높으셨다. 부 휘 상우 자 인보, 호 기천공은 박람강기하여 문학에 뛰어나 성균관 박사를 지내셨다. 모는 평해 구씨 도정 병례공의 따님이시다. 선생은 서기 1881년 3월 6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 주야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어려서는 충군효친의 가풍의 훈도를 받으며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하셨다. 20대 청년기에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고 국권이 찬탈되는 위기를 맞아 구국을 위한 혁신을 결단하시어 1906년 서울의 근대적 사립학교 돈명의숙에 입학하시어 1년간 수학하셨다. 1908년 2월 부터는 평북 구성군의 신민학교의 교원으로 구국계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셨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1910년대 중반 김동삼 등이 류하현에 설치한 백서농장과 신흥무관학교에서 총무로 활동하셨으며, 1920년에는 서간도 교포사회 자치조직 한족회의 상무사장과 독립군부대 서로군정서 내무사 실업과장의 책임도 맡으셨다. 1922년에는 서일, 김좌진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군정서의 국내 활동에 가담하시어 서울과 부여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 관헌에 체포되시어 1923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다가 함경남도 함흥 형무소로 이감되셨다. 1926년에는 중 감옥에서 출옥한 선생은 다시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셨다. 1925년 간도에서 이탁, 김동삼, 이청천 등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한 정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생계분과 위원을 맡으시고 유한농업공사를 조직하셨다. 1926년에는 중앙집행위원이 되시어 정의부를 이끄셨다. 1927년에는 김동삼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교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셨다. 1930년대에는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함흥을 거쳐 간도로 건너왔으나 선생께서는 가사를 돌볼 겨를이 없이 나라를 찾기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 광복이 된 후, 1947년 가족과 함께 귀향하시어 후학을 양성하시다가 1962년 7월 8일 향년 83세로 작고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뜻을 기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표창령 제12조 2에 의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12월 26일 대한민국 헌법규정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기 2011년 6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