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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 과거․현재․미래를 논하다 108 라 그 해석을 달리해왔으며 관련한 각종 기념사업도 지금껏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의미가 투사되며 이루어져 왔다. 본 발표문은 지난 백여 년 간 시대별로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차원에서 추진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 남아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 념, 전시시설 현황과 전시·기념사업의 성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한국에서 이뤄 진 국가차원 또는 지방자치단체 및 동학농민혁명관련 민간 기념사업 단체들의 활동과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연원과 현황 1)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단계별 현황 (1)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1단계(1894∼1910) 이 시기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념사업은 관(官)이나 반농민군(反農民軍) 후손 이 주도하였고, 목적도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 반농민군 측의 순절과 충의를 기리는 데 있었다.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반대와 일제 침략에 저항한 의미는 철저히 배제되 었다. 기념물의 양식도 모두 망자를 제사 지내는 단(壇)이나 특정인의 활동상을 기록 한 비석 등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몇 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장흥의 영회당(永懷堂) 건립과 수성장졸순절비(守城將卒殉節碑)를 들 수 있는 데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진압한 후 조선 정부는 박헌양(朴憲陽)과 함께 죽은 수성장 졸(守城將卒)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고종(高宗)은 영회당을 사액 하고 순절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의 전면에는 「광서(光緖) 20년(年) 갑오동란(甲午東亂) 수성장졸(守城將卒) 순 절비(殉節碑)」란 비명(碑銘)아래 부사 박헌양과 함께 순절한 장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기우만(奇宇萬)이 찬양한 박헌양의 공적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다. 전남 나주시 과원동(果院洞)에 있는 금성토평비(金星討平碑)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과 싸워 나주성을 수성(守城)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웠다. 본 래는 나주목(羅州牧) 내의 정수루(正綏樓) 앞에 세워졌으나 1930년에 금성관(錦城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