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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환은 정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26년 「6·10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사상 3·1독립운동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그것은 기미년 독립만세 이후 7년만에 일어난 운동으로서 융희황제가 동년 4월 26일에 붕어하여 6월 10일로 인산일(因山日)이 결정되자 맺혔던 분노가 폭발되어 일어났다. 또한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협력으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당초에는 세 갈래로 이 운동이 계획되었는데 첫째는 공산당원이던 권오설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나, 서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좌절되었으며, 둘째는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이며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이병립(李炳立)에 의하여 추진된 것으로 권오설로부터 지도를 받아 착수하였다. 세 번째가 통동계(通洞系)라 불리우는 중앙고보의 이동환과 박용규(朴龍圭)가 중심이 된 계획으로서 이들은 1926년 5월 16일 문인근(文仁根)의 하숙에서 거사에 필요한 동지규합의 방법은 논의하였으며, 그는 제일(第一)고보 동쪽에 있는 학교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5월 23일에는 다시 삼선호(三仙湖)에 모였는데 그는 독립만세보다 일본인의 집단거주지인 당시 목정(木町)을 습격하고 총독부를 때려부수자고 제의하였으나 극소수의 찬성밖에 얻지 못하였다. 이틀 후인 5월 26일에 모인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 제국주의 일본이다. 이천만 동포야! 죽음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만세·만세! 조선독립 만세. 단기 43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 최남선(崔南善) 최 린(崔 麟) 5월 30일에는 약 5천여장의 격문을 프린트하였고, 6월 8일에는 이를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그는 중앙고보의 최재민(崔載民)에게 4백여매를 주어 당일 거사시 살포하도록 하였다. 6월 10일에는 30만의 애도 군중이 연도에 몰려나왔는데 그는 오후 2시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박용규(朴龍圭)·황정환(黃廷煥) 등과 함께 격문 7백여매를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6월 19일 이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중앙고보생 18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6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의 공소심에서 1927년 4월 1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동년 9월 20일 서대문 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