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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도 손발이 되어 유달산 봉홧불 올릴때와 여러 차례 독립군의 이동 등 활동에 큰 도움을 주셨고 애국심이 강한 아버님은 모아둔 돈으로 활동자금도 대주며 긴밀한 유대를 가져오셨습니다. 희망이 없고 암울했던 그 시기에 지역 주민들에게 흑산도 해상에서 일본군의 시체가 떠내려 오는 걸 목격하시고 일본이 곧 망하니 희망을 갖자고 말씀하신 내용이 고발당하여 나주 일경에게 구속되어 온갖 고문으로 독립군의 행방을 추궁하나 피골이 상진되어 혈변을 보면서도 절개를 지키시고 굴하지 않아 미결수 8개월을 고문받고 조사 당하다 공산면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유언비어 날조라는 죄명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1년 6개월형을 받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출소하셨습니다. 고 병욱은 미결수로 고문에 시달리며 고통속에서 뼈와 가죽만 남아 혈변을 보면서 고통받고 있는 아들을 면회다녀오신 후 우리 재산을 전부 내놓고 아들 구명운동을 시작했으나 사상범이라 어찌 할 수 없다 하니 그 길로 가슴에 피병으로 누우시고 아버님이 출수 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를 하셨지만 2년만에 돌아가시니 출상 후 삼년을 조석 상식하시면서 외출때면 할아버지 산소에 들려 큰절을 올리시고 오실때도 큰절을 올리시는 효심이 지극하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새 정부가 수립되니 공산면 청년단 부단장으로 선출되여 면민을 위해 일하시다 6.25가 되니 지역이 공산당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부유하다는 이유로 우익이란 당이 되어 숨죽이고 살고 있던 중 음력으로 9월 3일 정부측에서 비밀히 4일 공산면에 국군이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