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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회는 전남 남평(南平) 사람이다. 1907년 6월 기삼연(奇參衍) 의병진에서 활동하다가 기삼연이 순국하자 동년 11월 심남일(沈南一) 의병진에 다시 들어가 구국 활동을 하였다. 1908년 3월 7일부터 10월까지 계속하여 전남 영광(靈光)·강진(康津)·장흥(長興)·남평 등 각군에서 5회에 걸쳐 일본헌병 및 순사대와 결사적으로 전투하였다. 동년 10월 조경환(曺京煥) 의진의 참모로 12월경까지 총기를 휴대하고 함평(咸平)·광주(光州) 등지에서일본 헌병대와 4회에 걸쳐 전투하였다. 동년 12월 박민홍(朴珉洪) 의병진이 40여정의 총기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할 때 부하가 40내지 50여명이 되자 이곳의 참모장이 되어 함께 나주(羅州)·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2회에 걸쳐 전투하였다. 1909년 1월 2일에 휘하 40여명의 의병과 함께 무안(務安) 읍내에서 순사 함필영의 숙소를 포위 공격하여 순사제복 및 대검 등 20여점을 노획하고 함필영(咸弼永)을 사살하였다. 동년 2월 1일 이후 행적을 감추고 있다가 구세군(救世軍)의 부위(副尉)가 되었으나, 동년 9월 25일 장흥군(長興郡) 눌양리(訥陽里)에서 일군에 의해 피체되었다. 1910년 4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6월 11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으며, 동년 7월 1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