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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범은 전북 부안(扶安) 출신으로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면암은 이미 노환이 깊어 대마도에서 운명의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치범은 멀리 계신 면암을 그리며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정성스럽고 효도하고 충성됨이 자청(紫淸)에 맞으니 자청(紫淸)이야 응당 대명(大明)의 소리 감동시키리 높은 물결 돛대를 바람 순한 날에 돌이키니 마둘가리 다듬어 중생(衆生)건지려고 애썼네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