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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해학 이기 선생은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전봉준에게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1906년에는 장지연, 박은식 등과 함게 애국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7년 2월 을사오적신을 처단하고자 나인영, 오기호 등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하고 거사를 시도하엿으나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히고 피체되고 말았다. 1907년 유배형(7년)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에 귀양갔다 풀려난 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는 이를 기리기 위해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건립위원회가 1983년 8월 1일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5년 10월 14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