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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신천(信川) 사람이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을 따라 총을 들고 도내에서 동학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17세되던 1895년에는 부친을 따라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하고 프랑스인 홍신부와 함께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27세되던 광무 9년(1905)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집을 평안도의 진남포(鎭南浦)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李範允)·김두성(金斗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융희 2년(1908)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慶興)·회령(會寧)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다시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金基龍)·백규삼(白圭三) 등 동지들과 함께 12인이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며 일사보국을 맹세하고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였다.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일찍부터 뜻을 같이하던 우덕순(禹德淳)을 만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다음 권총을 한 개씩 준비하였다. 그리고 하얼빈 방면으로 향해서 가는 도중 다시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 두 사람을 만나 함께 참가하게 되었으며 거사장소를 남청(南淸) 철도의 교환점인 채가구(蔡家溝)와 하얼빈의 두 곳으로 정하고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그는 하얼빈에서 기다리다가 엄습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경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는 다시 이등의 뒤를 따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거사의 성공을 알리는 개가(凱歌)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본국 동포들의 그 큰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또한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군대해산이 있은 후 중국 상해로 가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예관() 신규식(申圭植)의 다음과 같은 시 또한 당시 상황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白日靑天霹靂聲 大州諸子魂膽驚 英雄一怒奸雄斃 獨立三呼祖國生 1909년 11월 그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되었는데 일제 관리들은 위세를 부리며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들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통렬히 공박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일제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판정에서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누차에 걸쳐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 인도의 적이요, 우리 대한 신민(臣民) 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불법무도한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 15개조의 죄상을 들어 서면으로 저들에게 제출하여 다시금 이등박문을 논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등박문의 처단은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것이요, 정작 큰 소원은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임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의 공판을 받았던 그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순국 직전에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광복된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남북이 갈라진 채 그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