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page


323page

숙처를 거점 삼아 수차 밀회를 거듭하여 단원이 80여명에 이르렀고 전국강으로 33식 점조직 행동을 모책하던 중 42년 2월에 경북 예천에서 동지 밀회타가 왜경에 탄로돼 80여명의 국내외 전 동지가 체포되고 예천 영주 상주 봉화 안동 문경 점촌 경찰서에 구금 유치됐었다. 매질 및 꺼꾸로 매달고 한겨울에 코에다 물붓기 등 잔인한 고문 끝에 그 해 10월에야 20여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나머지는 대구형무소로 이감 후 오랜 예심 기간을 거쳐 43년 7월 7일에사 대구지방법원 판결로서 각각 수형했는데 공은 42년 2월 23일 동경 세타가야 송택정 하숙집에서 체포당하여 대구지방검사국을 거쳐 상주경찰서에 유치됐었다. 해방과 건국 이후 동지 대표 이상만은 건국포장을 공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문교부 주최 성인교육 문맹자 퇴치 양성소에서 두 달 동안의 교육을 받은 다음 경남 성인교육 지도주사로서 고성군 주재 근무때 1읍 13면의 자연부락 마다에 공민학교를 세워 한글을 배우게 하는 등유와 학용품마저 희사하여 가며 5년 세월을 봉사하였다. 6.25가 터지자 방위장교로 몸바쳐 괴뢰군의 진주 방면 침입때는 150명을 진두 지휘하여 고성 영오 원문곡 동해당 거리 등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집결지 부산에서는 마산 교육대 제3대대장으로 임명받았다가 총공격령이 내리자 산청 방면까지 진격하여 3년간의 방위군 생활을 끝내었다. 귀농하여 비산 비야를 일구고 현재 4천평의 옥토 중 천평의 인삼포도 재배하는 다각 농가로서 각 기관의 자문 및 학교의 육성회장 정화위원장을 지내고 또는 광복회원 학구단위 노인회장 은정자 유적회장 등을 책임진 애향적 사회 공로로 내무부와 경남도의 장관 감사장도 받은 적이 있었다. 86년 7월 28일에 67세로 떠나매 벽방산 고등선좌에 고이 잠들다. 슬하에 1남 2녀로 현석(성만) 다음 영숙은 서 김수웅을 명숙은 서 박도만을 저마다 배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