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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필주 선생은, 충남 아산(牙山) 사람이다. 1904년 5월 30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고 일본이 황무지개척권(荒蕪地開拓權)을 요구하자 나 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 기(李沂) 등 3명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국민에게 발표하고, 1905년 6월 나 철·오기호·이 기 등과 같이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이등박문(伊藤博文) 등 일본의 침략원흉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일황과 이등박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1906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실시되자 장지연(張志淵)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이 되어 동회의 회보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국민정신을 계몽하며 선도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나 철·이 기 등과 같이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 5적을 주살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09년 3월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자 장지연·권동진(權東鎭)과 같이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으며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6월 일본 동경(東京)에 재차 건너가 대외중신(大 重信)·두산만(頭山滿) 등 일본인을 만나 한국침략을 통렬히 논박하였으며, 그곳에서 이홍장(李鴻章)이 특파한 양계초(梁啓超)와 만나 일본의 식민정책 타도를 역설하면서 항일투쟁정신을 나타내었다. 1910년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현재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기호흥학원(畿湖興學院)의 초대 학무부장(學務部長)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앞장서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