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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3월31일 토요일 12 (제135호) 기획 경남합천군삼가면의최남단에위치하며남쪽은의령군대의면과서쪽은산청군과경계를이루는토동마을은양 천강의물줄기가북에서남으로길게뻗은들판을 끼고있어풍요롭기만하다.밀성박씨인당공후(后)호군공(護軍公,휘季蕃)이경남밀양에서이주한이후400여년 의집성촌으로마을입구에들어서면아담하면서 도정결한재사(齋舍)사효재(思孝齋)의기둥에걸린글귀가먼저들어온다.‘선악은마음에서비롯되니어짐앞에 는악도어질지어라(善惡由心用仁前惡反仁)이는 입향이후후손들의생활을짐작해볼만하다.호군공은배경이나여건으로보아능히관직에나가부귀를꿈꿀수있 었으나향리(鄕里)에서세인(世人)들의본보기가 되었으며,그의현손휘사돈(士敦)은아들건갑(乾甲),곤갑(坤甲)과더불어임란에서창의하여큰공을세웠음에도 공명을멀리하고스승의신원(伸寃)을위해노력하 다 큰 고 초를 겪 는 등 그 심 성이 아 름답 기 그 지없 다. 이 에 이 번호 에서 는 사효 재와 호군 공 그리 고 그의 후예 임 란창 의 삼부 자 에 대해 알 아본 다. 호군공의 휘는 계번(季蕃)으로 밀성대군 후(后) 은산부원군(휘영균)의증손이다.고려의국운이마 치게 되자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지 키며 사람의 기강을 천지(天地)의 사이에 수립(樹 立)한 충숙공(忠肅公)송은(松隱,휘 翊)선생은 조 부가된다.아버지인당공(忍堂公)의자(字)는회옹 (晦翁) 휘는 소(昭), 맏형 우당공(휘 융)과 쌍둥이 로 태어나 포은 정몽주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아름다운 덕행으로 이름났다. 조선 태종 때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안음현감을 지내면서 청 백한관리로이름나청백비가세워졌다. 호군공의 토동 입향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인 숙인(淑人) 인천이씨(仁川李氏)와 결혼하면 서 처가의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숙인이씨 는 현감 유(柚)의 따님으 로 영모재(永慕齋) 이환 (李桓)의 손녀로 합천 토 동이 본가이므로 호군공 은 생관(甥館, 사위가 사 는 집)하게 된 것이다. 당 시 이씨 문중에는 큰 선비 와 학자가 많아 더불어 여 유롭게 놀면서 주고받으 며 가히 기예(技藝)와 강 론(講論)을 이야기하며 서로 성장(成長)하는 장 소가 있어 이미 자기(自 己)에게터득함이있을뿐 만 아니라 사물(事物)에게 미침이 있었던 것이니, 스스로 능히 세상에 나가서 등용(登用) 됨을 구(求) 할 생각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경사(京師, 한 양)에 나가 종유(從遊,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 을 좇아 더불어 사귀고 노닒)하며 가히 할 수 있는 처지가 있을 것을 도모(圖謀)하였으나, 세월이 덧 없이 흘러 세월이 나그네의 구름과 객지(客地)의 비속에 없어지니, 후일에 올 미미(微微)한 말단(末 端)의 직책은 본래의 뜻을 펼칠 바가 아니었다. 이에 혼자 수초부(遂初賦, 한나라 유음이 지은 初志를 이루겠다는 것을 노래하는 글)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산에 올라가서 꿈을 머금어 펼 치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적막(寂寞)하게 희망을 품고 넓게 권면(勸勉)하면서 세상 사이에 영화 (榮華)나 병(病)들고 시들어짐과 얻고 잃음이 가 히 걱정되고 가히 즐거움이 됨을 알지 못하였으 며, 또한 때로는 밭이랑이나 산언덕의 사이를 왕 래하며 소요(逍遙)하고 노닐며 충분히 사물의 밖 에 유람(遊覽)함으로 자신을 의탁(依託)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계율(戒律)하고 집을 다스리 는 규범(規範)에는 저절로 준엄(峻嚴)함이 있었 고, 산만(散漫)하게 흘러가거나 게으름에 안주 (安住)함은있지않았다. 이러함으로서자제(子弟)를가르침에는시서(詩 書)를 익힘이 게으르지 않았고, 효제(孝悌)를 행함 에도더욱돈독(敦篤)하니충분히향리에서본보기 가 되어 흘러가는 세속에 깨우침이 피어났다 . 이렇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자손이 세세(世世) 로 물려주신 규범을 지키며 독서(讀書)로서 세업 (世業)을 삼고 밭을 갈고 김을 맴으로서 생업(生業) 을 삼으니 문학(文學)과 행의(行義)에서 가히 고가 (古家)의 남은 혜택을 볼 수가 있었고,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 는 높은 도덕성을 보였고, 국난에 몸을 아끼지 않은 살신성인의자세로창의하기에이른것이다. 1592년 4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 와 서 울 을 향 한 북 진 을 계 속 해 2 개 월 도 채 못 되 어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이때 각 지역에서는 의 병창의가 일어났고 경상지역에서는 곽재우와 정 인홍,김면,박성 등 많은 의병장들의 활동으로 왜 적의 북진은 많은 암초를 만난 듯 더디기만 하였 다. 특히 진주성과 호남진출의 길목이라 할 수 있 는 합천 삼가지역과 의령 정진(鼎津) 전투는 역 사에 남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 호군공의 후예 삼 부자가 있었다. 이들 삼부자는 가동(家 뚝)과 촌 정(村丁)을 동원 아버지 휘 사돈(士敦)은 후방에 서 아들 형제의 자문과 지도를 하며 의병 모병과 군수보급을 아들 건갑, 곤갑 형제는 전투에서 혁 혁한 공을 세웠으나 공명을 멀리하여 초야에 돌 아와흐트러진민심수습에앞장섰다. 그리고 전란 후 240년이 지난 1832년 합천 유생 이상돈외35명이연서하여 이들의 충렬에 대한보 상을 청원하는 소를 제기하고 이후에도 1903년까 지 10여 차례에 걸쳐 지역 유생 100여명이 연서하 여 청원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스승인 내암 정인홍의 신원(伸寃)을 위해 올린 우졸재(愚 拙齋,휘 건갑) 공의 상소에 많은 적이 만들어지고 인조반정 이후 당파싸움, 당사자인 이언적과 이황 의 문 인 등 에 의 해 청 원 이 받 아 드 리 지 않 았 나 생 각 해 본다. 그러나 늦은 감은 있으나 2001년 건립된 합천창의의사기념관 창의사에 배향되어 매년 5월 10일 향화(香火)를 받들고 합천지역 의병의 역사 를재조명하고다행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 ▲박사돈(朴士敦) 창 의 의 사 휘 사 돈 (士 敦 ) 은 선 무 랑 공 휘 유 (愉 ) 의 아들로 1542년(중종 37) 합천군 삼가면 토동 에서태어났으며,입향조호군공의현손이다. 1592년 임진왜란에 환갑의 나이를 돌보지 않고 아들 건갑, 곤갑 형제와 삼부자가 합심하여 가동 (家뚝, 집안의 사내종)과 촌정(村丁)을 동원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향토(鄕土)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아들 형제의 자문(諮問)과 지도 (指導)에 힘쓰는 한편 모병(募兵) 등 후방에서의 군수보급활동을비롯한의병(義兵)의뒷바라지로 적(敵)을물리치는데크게이바지하였던 것이다. 난후(亂後)에는 뇌용정(雷龍亭, 남명 조식선생 이 학문에 열중하며 제자를 가르친 곳)을 중심으 로 벗들과 교우강마(校友講磨)하며 흐트러진 민 심(民心) 수습에 힘을 쓰다가 졸하였으나 그 해는 미상(未詳)이다. 1832년(순조32)부터 1903년(고 종 광무7)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영남유사(嶺南儒 士) 10 0여 명 이 연 서 (連書 )로 박 씨 삼 부 자 의 충 절 (忠節)을 현(顯)하고 정려(旌閭)의 소(疎)를 올렸 으나 망국(亡國)의 국치(國恥)와 함께 그 뜻을 이 루지못하고그때의기록은현재종손과문중에의 해보관(保管)전해지고있다.(상소문참조) ▲박건갑(朴乾甲) 통덕랑공 휘 사돈(士敦)의 장자로 1558년 향리 인 토동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응무(應茂), 호 (號)는 우졸재(愚拙齋)라 하였다.그는 자라서 내 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선생의 문하(門下)에 서 학덕(學德)을 닦으니 기개(氣槪) 웅대(雄大) 하고 문장이 분명하고 자세하여 주위(周圍)의 부 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선조 임진년에 바다건너 왜적이 침공하여 나라의운세가백척간두(百尺竿 頭)에 놓이자 그는 타고난 기개(氣槪)와 애국(愛 國)하는 마음과 부(父)와 스승의 뜻을 받아 아우 인 곤갑(坤甲)과 함께 가동(家 뚝)을 동원하고 촌 정(村丁)을모아창의(倡義)에동참하였다. 삼가(三嘉)에서는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정금당 (淨襟堂, 삼가현 객사 바깥채)에 모여 토적(討賊)을 다짐하고 의병장 윤탁이 정병(精兵)을 뽑아 이끌고 의령 정진(鼎津)에 나아가 진(陳)을 치고 의령 의병 장 곽재우와 지역을 분담하여 적(敵)을 막으니 정진 에서신번까지의상하60리를맡고의령군은현풍(玄 風),창녕(昌寧),영산(靈山)을맡아지킨것이다. 그는 정진(鼎津)의 삼가본진(三嘉本陣)에 참 가하여 강안(江岸)에 있는 산(山)에 매복(埋伏) 하고 강(江)을 건너려는 적을 시석(矢石)으로 물 리치고크게이기니이싸움이정전전투이다. 이 싸움은 삼가군(三嘉軍)이 올린 전과(戰果) 이며 이곳을 잘 지켰기 때문에 계사년(癸巳年,15 93년) 진주성이 함락되기까지 삼가에는 적침(敵 侵)이없었던것이다. 그는 후(後)에도 삼가군이 싸운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나 절대 자기의 공(功)을 내세우지 않았다. 계사(癸巳, 1593)년 이듬해인 갑오년(甲午, 1594년)에는 성주목사 곽재우가 악 견산성을 수축할 때 동참하여 그를 도왔으니 그 의애국하고애족하는정성을엿볼수있다. 난후(亂後)에는 다시 학구(學究)에 정진하여 소과에 급제하고 성균생원이 되었다.대동야승(大 東野乘) 응천일록(凝川日錄)에 그는 스승 내암 (來庵)이 어 려 움 에 처 했 을 때 그 를 구 하 기 위 하 여 소(疎)를 올렸다가 유배(流配)되기도 하였으며 후(後)에는 내암의 잔당으로 지목되어 고초(苦 楚)를 겪기도 하였다. 또 그와 동문수학한 유경갑 (劉敬甲), 형효갑(邢孝甲) 등의 3인이 몸을 돌보 지 않 고 열 성 적 (熱誠的 )으 로 그 들 의 스 승 인 내 암 을 위 하 여 보 호 하 려 고 애 를 쓴 이 름 에 갑 (甲 )이 드 는 세 사 람 이 라 하 여 삼 갑 (三甲 )으 로 불 리 었 다 한 다. 만년에는 향리(鄕里)에서 충효재(忠孝齋)를 지어독서강마(讀書講磨)하며여생을보냈다. 註 -대동야승(大東野乘): 조선시대 여러 사람 들이쓴야사와잡록을모아놓은대표적인전집 -응천일록(凝川日錄): 조선 후기의 문신 박정 현(朴鼎賢:1562~1637)이 광해군대와 인조 초반 의사실을일지형식으로기록한책 ▲박곤갑(朴坤甲) 통덕랑공 휘 사돈(士敦)의 차자이고, 우졸재(愚 拙齋) 건갑(乾甲)의 동생으로 1562년(명종16)에 향 리 토 동 에 서 출 생 하 니 자 는 응 신 (應辛)이 며 호 는 묵성재(默成齋)라 하였다. 세보에 의하면 형에 이어 소과급제하여 성균생원이 되었다고 전해진 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형(父兄)과 함께 창의 에 동 참 하 여 왜 적 을 물 리 치 기 위 하 여 정 성 을 다 하 였다.그도 형과 함께 삼가군의 정진본진에서 왜적 이 강을 건너 호남진출의 길을 열려하자 우리 삼가 군사는 강가에 있는 산에 매복하여 시석(矢石)을 퍼주며 공격에 가하자 적이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 자 이를 뒤쫓아 가서 많은 적을 베고 물리쳤다. 이 싸움이 정진의 승전이며 그도 이 싸움에 참가하여 공(功)을 세웠으며,그 후에도 삼가군이 치른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힘을 다하였 다. 1594년에는 성주목사 곽재우가 조정의 명령으 로 다시 악견산을 수축하게 되자 이에 참가하여 그를 도왔으니 국적(國賊)을 물리치는 데는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난후(亂 後)의 동정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기록을 하기 어려우며 그도 역시 졸년(卒年)이 미상이라 향년 (享年)을 알 수 없으나 묘소는 진주 대곡면 설매 곡해좌원에있다. (번역문)....민규들은 삼가 ....께 삼가 절하고 글 을올립니다. ....하는 것은 국가의 전례이 고 빠지고 오래 된 것을 캐내어 주워 모으는 것 을 수령(守令) 이나 관찰사의 직무입니다. 진 실로 포상할 만 한 어진 이가 있 는데도 높이고 보답하는 은전 을 입지 못한 이 가 있다며, 곧 실 제의 조목을 들 어서 펴는 것도 또한 사림의 양 심(良心)입니다.본읍토동에옛통덕랑박사돈공과, 그 장자 우졸재(愚拙齋) 건갑(乾甲)과 차자 묵성재 (默醒齋)곤갑(坤甲)이임진왜란에섬왜적이창궐함 을 만나,임금의 수레가 파천(播遷)하시고 서울이 침 몰되며 여러 군진(軍陣)이 달아나고 무너지게 되어 한사람도도적들을막을자가없게되자,박공삼부자 가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고 개연(慨然)하게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가문이 세세로 나라의 두터 운은혜를받았는데,......신하된자가편히있을날이아 니다.”라 하고, 가묘(家廟)에 사직인사를 하고, 처자 (妻子)를 버리고, 바로 충익공 곽망우당의 군진(軍 陣)가운데나아갔으니,삼부자의성명이모두화왕성 창의록및본현읍지에실려있습니다. 대개 통덕랑 박공은 문효공 하연(河演)상국의 외손이며,......묵성재(默醒齋)로 더불어 난형난제 이면서 천자(天資) 일찍 숙성하고, 국량이 깊고 컸으며, 일찍 월사 이정구와 옥계 노진 양현(兩 賢)의 문하에 수업하였으며, 실천하기를 독실히 하고, 강개(慷慨)하여 대절(大節)이 있고, 풍채 도 늠름하며 문장과 학문으로 모두 당시에 울렸 습니다. 옛 충익공 곽재우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 하여 항상 군막에 두고,......항상 화살과 돌이 날아 오 는 사 이 에 따 라 다 며 , 흉 봉 (兇 鋒 )을 막 는 것 으 로 기약하고, 강회(江淮)의 보장이 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습니다. 진양성이 포위됨을 듣고,곧 몇 부대로 나누어서,칼날을 무릅쓰고 혈 전하여 도적 베기를 무수히 하여 충익공과 처음 부터 끝까지 같이 했지만, 태평시대가 된 뒤에는 겸손하고 물러가서 자랑하지 아니하여, 입으로 창의(倡義)의 일과 도적을 토벌한 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하니, 곧 문정공 남명 조선생 도의 를 강론하는 장소였습니다. 통덕랑 중부(仲父) 흔( )은 남명(南冥)의 문인(門人)으로 유적(遺 跡)이많이있는고로통덕랑이 계산(溪山)의그윽 한 취미에 뜻을 의탁하여 남명 선생의 유촉(遺 )에 사모함을 부쳤습니다.명리(名利)를 피해 감추 고어둡게하는것을일을삼아천수를마쳤습니다. 우졸재(愚拙齋) 건갑(乾甲)은 ...... 더불어 교유하 는 분들이 모두 일대의 명현(名賢)으로 일신당 (日新堂) 이천경(李天慶) 공과 부사(浮査)성여 신(成汝信) 공과 노파(蘆坡) 이흘(李屹) 공이 막 역지교(莫逆之交)였습니다. 매일 셋이 모여 앉아 강마(講磨)하면서 아침저녁을 몰랐으니, 호학 (好學)의 독실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당시 후학 이 ......우졸재(愚拙齋)의 장자 규(規)와 차자 구 (矩)는 생원에 연달아 합격하고, 모두 문학과 □ □으로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진양성 혈전의 날 에 있어서, 임금께서 들으시고, “아! 아름답도다! 도덕으로 나라의 방패와 성곽이 되었도다. 재주 는 문무를 겸하고 시국에 응변하여 솔선수범한 사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공훈을 기록하게 됨 에 ......부자(父子)의 탁월한 충성과 큰 절개로도 당일에 관작과 품질을 임금께 보고되지 못한 것은, 대개 겸퇴(謙退)하여 자랑하지 아니함에 말미암았 고, 지금까지도 잠기고 어둡게 되어 사당에 제사 드 리는 전례(典禮)가 없는 것은 후손의 미약함 때문이 었습니다.이제임진의옛갑자를맞이하여진주의사 림이 박씨(朴氏) 삼충(三忠)과 구씨(具氏) 사충(四 忠)의......첨정(僉正)구응삼(具應參)공은임금의수 레를 부여잡고 호종하여 원종공신이등에 공훈이 기 록되고,그의형만호(萬戶)응진(應辰)은힘써싸우 다가 잡혔지만 도적들을 꾸짖으며 굽히지 아니하다 가 죽으니, 공훈이 이등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아우 주부(主簿) 응성(應星)은 홀 몸으로 도적들에게 나 아가 곳마다 공을 세웠으니, 도원수 권율 공과 충익 공......동(棟)은나이겨우스물에부친의형제들이창 의(倡義)하는 것을 보고,의병들을 분리시켜 의령과 함안 두 읍의 사이에서 도적을 토벌하니, 도적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무너지면서 말하길, “소년 장군 에게대들지말라.”라하였으니,그일이곽재우공의 포상을위한보고에있었습니다.그러나끝내공훈을 기록하지못하였습니다.그러나창원과진해의두읍 지에분명히고찰할수가있습니다. ...... 나라와 고을의 전설이 되어 있으면서 백세(百 世)에존경하고앙모할분입니다.옛갑자가거듭돌 아옴에여론(輿論)이같은목소리이니,이것이정히 칠충(七忠)에게포상하고천양할때입니다.이제합 하께서북쪽대궐에서지방관에임명되어남쪽고을 을 교화함에 현자를 높혀 교화를 세우려는 마음을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간절히 하셨습니다.그러므로 저희들이 양심 ......의 의리로 사실을 들어서 임금께 올려 모두포상을 받은처지가되게 하기를,천만 번 간절히기도하기를지극히함에삼가몽매함을무릅 쓰고......에게우러러진정(陳情)합니다. 임진(壬辰:1832)9월 일 이동일 외 35명 사효재는 호군공(휘 계번)을 비롯한 후예 20位 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1일을 기준으 로하여 첫 일요일 향사(享祀)하는 재사(齋舍)로 합천군삼가면남명로97(외토리482-1)에있다. 정면 3칸 특면 2칸의 사효재 최초 건립은 호군 공이 토동에 우거(寓居)하시고 여기에서 돌아가 시니, 이곳 토동의 북쪽에 있는 종달산(從達山) 의 임좌에 영유(永幽) 하시고 부인 공인 인천이 씨도 같이 합부하시다. 그 후 자손들이 토동에 대 대로 살아온지 400여년 동안 세거하며,더욱이 매 번 묘사(墓祀)를 지내오며 분암(墳庵)이 없음을 개탄하던 차 1969년에 이르러 예손 희채(熙彩)와 더불어 재종이 발의하여 토동의 유정지(幽靜地) 에 삼간옥(三間屋)을 축조하고 봉선사효(奉先思 孝)의 어를 취서하야 편액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락하여 지난해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영태, 총무 인호)를 구성하여 전국 성손 들의 헌성이 이어져 아름답고 정결한 재사로 거 듭 태어났다. 특히 선조의 가르침으로 이어진 주 련의 글귀는 근대에 사는 후손들의 삶의 지표가 되는듯하여옮겨본다. 【선악은 마음에서 비롯되니 어짐 앞에는 악도 어질지어라(善惡由心用仁前惡反仁)/ 어질려면 마땅이 덕을 베풀어라 방종과 잔인함은 자신을 헤치니(慾仁宜布德綜虐自亡身)/ 선함 앞에 위협 은 설자리 없고 사사로운 정에 정사는 진실을 잃 으리라(徒善威無處私情政失眞)/ 어떤 약속이든 잊지 말아라 성냄과 급함은 사람을 상하나니(莫 忘何約束怒急是傷人)】 △주(註) 분암(墳庵) : 선영 인근에 지어 재를 지내고묘지를관리하던역할을하는곳. 思孝齋와 임란창의 삼부자(朴士敦, 朴 乾甲, 朴坤甲) 선조 유지를찾아븣 호군공(護軍公)의선원세계 토동마을전경-토동마을은인천이씨의8世로공민왕조문하시중이작신(李作臣)이최초입향하였으며,남명조식선생이태어난곳 이다.인천이씨영모재이온(永慕齋李穩)선생을추모하 는용연사와남명조식선생이학문을지어제자들을가르쳤던뇌용정과선생을추모하기위해지은용암서원이있다.남명조식선 생은인천이씨의14세부정공이국(李菊)의외손자이기도 하여인천이씨문중과남명조식선생,호군공종중과각별한인연이있고,우졸재(愚拙齋)박건갑(朴乾甲)선생은남명선생의제자 내암정인홍선생을스승으로모시고있어후손들이남명 학을잇고있음을알수있다.마을입구도로변의효열부인천이씨기적비는호군공의후예박태재의부인이다. 호군공 유허비- 토동마을 사효재앞에있다. 임란창의기념관-합천군용주면합첩댐아래에있다. 합천임란창의기념관창의사에모셔진삼부자위패 1 8 32년 합천 유생 이상돈 외 35명이 연 서하여 이들의 충렬에 대한 보상을 청 원하는소장 사효재전경(경남합천군삼가면남명로97(토동마을) 사효재 중건추진위원회 임원진이 지난 2월 25일 결산에 이 어해산하고한자리에모였다.(왼쪽부터종태위원, 영태위 원장,춘순위원,덕기회장,인호총무順) 호군공의토동입향과생애 임란창의 삼부자 박씨삼부자의충렬에대한포상청원소(疎) 사효재(思孝齋)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