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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출 선생은,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부터 17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安平面大司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3월 8일의 대구(大邱) 학생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朴尙東)의 귀향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그는 당시 대사동 교회 영수(領袖)로서, 3월 15일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에는 다시 김옥돈·이북술·이만준(李萬俊)·김길도(金吉道)·이맹준(李孟俊)·최상근(崔相根) 등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행진한 후 자진 해산하였으며, 이튿날에도 오후 8시경,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부락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자진 해산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남여명(南汝明)·박승채(朴升采) 등이 조직한 군자금 모금을 위한 비밀결사단체인 인도회의소(人道會議所)에 가입하여, 손인식(孫仁植)·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였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