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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홍 선생은,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禮安面)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예안면장인 신상면(申相冕)이 3월 11일 밤 9시에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 독립신문을 보여주면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함으로써 발단이 되었다. 그들은 이에 뜻을 같이 하여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이곳에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하고 이 계획을 인근의 각 동리로 연락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는 다른 장날과는 달리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장꾼으로 위장하고 모여들자, 약속대로 30여명의 주동자들이 면사무소 뒷편의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그곳에 세워놓은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의 시위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이때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 조전등길(曹田藤吉)이 출동하여 25명의 시위군중을 체포해갔다. 이에 격분한 그는 오후 7시경,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이어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일 대구(大邱)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태형 90도의 형을 받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여독으로 말미암아 평생을 자녀도 두지 못한 채 불구로 보냈다. 그리고 1922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시까지 계속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