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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 사. ‘을미의병발상지’ 표석문 李粲永 李昌俊 李千甫 李春明 李春永 李泰榮 李豊林 李弼熙 李恒載 任玉汝 林乙善 林應西 張桂還 張守奉 全明澤 全鳳基 全性煥 全雲龍 全昌植 全化春 鄭樂寅 鄭大一 鄭東燮 鄭鳳俊 鄭時恒 鄭永甫 鄭永雲 鄭永軫 鄭元集 鄭喆夏 曺道煥 趙應三 曺仁煥 趙正浩 車致瑞 車興俊 千洛龜 千厚根 崔大平 崔大鉉 崔明禹 崔永宇 崔友錫 崔有福 崔台憲 崔平心 韓甲復 韓相烈 韓聖寬 韓元泰 韓仁秀 韓鎭基 韓昌履 許 蔿 扈根榮 洪麒泳 洪思九 洪汝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평의병묘역아래 사이실 355번지 집터(301평)는 퇴앙 안종응, 하사 안승우, 우하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 발상지이다. 양동 은 당시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한국을 병탄하려고 국권을 농락하더니, 마침내 1895 년(乙未) 우리나라의 중전 민 황후를 학살하고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는 등 우리 조 국과 민족을 강점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야만성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퇴앙이 동지들과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사의 친우인 석곡리 목골출신 괴 은 이춘영 의사가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찾아와 퇴앙과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리 하여 괴은은 청운면으로 가서 김백선 의사를 만나 거의하기로 하고 의병 400명을 모 집하여 원주 안창으로 집결시켰다. 퇴앙은 제천에 있는 하사에게 명하기를, 화서 이항 로의 제자인 의암 류인석 선생에게 의병참여와 계책을 문의하여 안창으로 오라고 하였 다. 하사가 명을 수행하여 일행과 함께 안창 만수암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이춘영 ㆍ김백선ㆍ 김사정 여러 의사와 더불어 창의 호국투쟁을 결의하고 음력 11월 28일 안 창역에서 장수 괴은 이춘영이 단상에 올라 깃발을 높이 드니, 전국에서 가장 먼저였다. 의병진은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으로 진격하여 류인석 선생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류인 석 대장은 의병진을 재편하고 장기항전에 들어가 연합의진으로 발전하여 충주성을 빼 앗으려고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류인석 선생은 재기를 꿈꾸며 의병들을 이끌고 압 록강을 건너갔으나 1896년 음력 7월 31일 회인현 사첨자 파저강변에서 창의 8개월 만 에 무장해제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가장 방대하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장기 화된 항쟁으로,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다. 이상으로 보면 양동면 석곡리 355번지 집터는 화서학파가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창의 호국투쟁을 처음 논의한 곳이다. 이는 한국근대항일민족운동 50년사의 시발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