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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거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후 3·1운동 전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특히 1895년에 일 어난 을미의병은 광복되기까지 50년간 지속된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시발이었고, 한말 의병은 후에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져 국군이 되었으니 의병은 국군의 뿌리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은 선언하고 있다. 3·1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은 한말의병으로부 터 시작되었으며 한말의병은 을미의병이 그 시원이다. 국군의 뿌리이며, 대한민국의 법통인 임시정부수립의 초석이 된 3·1운동 등 독립운동의 시작이었기에 을미의병은 곧 국맥(國脈)의병이다. 양평은 명산인 용문산이 우뚝 솟아있으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해 민 족의 젖줄 한강을 이루는 산자수명한 고장으로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 터 도학과 의리를 숭상하는 기풍이 있다. 양평사람들은 이미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략 하여 나라가 위급하자 스스로 일어나 의병이 되어 나가 싸웠으며, 한말에도 다른 고장 에 비해 월등히 많은 분들이 의병이 되어 목숨 바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895년에 을미사변과 변복령ㆍ단발령을 시행하는 등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함에 따라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 아래 전기의병이 일어났다. 전기의병은 을미년에 일 어났으므로 을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전기의병의 지도이념은 양근 벽계의 화서 이항로 선생이 주창한 위정척사(衛正斥邪)였다. 전기의병 중 전국에서 가장 유력했던 의병진 은 의암 류인석 선생이 이끈 호좌의진(湖左義陣)인데, 이는 퇴앙 안종응의 주도로 이 춘영ㆍ안승우ㆍ김백선 의병장이 포군 4백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한 지평의 진이 주축이었으니, 지평은 전기의병의 발상지이다.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 창에 집결하여 거의한 지평의진은 원주ㆍ제천 등을 점령하고 단양 장회협전투 승리에 이어 충주성을 함락하고, 수안보ㆍ가흥 등지에서 항전하였다. 전기의병으로 일제는 우 리나라 침략을 일시 중단하기에 이르렀으며, 호좌의진은 서북행하여 만주로 들어가 후 일 중국내 독립군 활동근거지 중의 한 곳이 되었다. 이즈음 양근의 이승룡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진격을 위해 남한산성으로가 1,000여 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ㆍ한일협약의 체결,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중기의병이 일어났 고,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1907년 국권회복을 기치로 후기의병이 일 어났다. 이때 양근의 의병장 조인환ㆍ최대현ㆍ김춘수ㆍ이연년ㆍ최대평 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양근ㆍ지평의 관공서와 일본인 상점 등을 습격하였고 인근지역으로 활동영 역을 넓혀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괴롭히며 전공을 세웠다. 전국의 의병은 연합의진 결 성을 위해 이인영 대장 휘하에 양동에 집결하여 그 수가 5천여 명에 달했으니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