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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후면> 인심을 빼앗으면 국토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때 의거(義擧)는 두 가지 목표가 있으니 하나는 성인의 도(道)를 보존하는 것이요 하나는 국가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저 적들이 나라를 압박하니 의당 급하게 인심을 선동하여 저들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또 대사(大事)를 이루려면 온 나라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 단기 4342년(서기 2009)년 8월 15일 세움:상촌장학회 후원:고흥류씨부학공파종회 월간선진한국ㆍ문화경제신문사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1842~1915) 선생의 본관은 고흥(高興)으로 강원도 춘천시 남면에서 중곤(重坤)공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셨다. 화서 이항로, 중안 김평묵, 성재 류중교 세 선생 문하에서 금계 이근원, 항와 류중악 선생과 동문수학하셨다. 선생은 세 선생의 도통(道統)과 위정척사사상을 정통으로 계 승하고 민족자주의식을 발현하여 항일독립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셨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라는 변괴가 있자 제천 장담에서 문인사우들에게 처변삼 사(處變三事)를 제시하시고 지평의병 창의를 간접적으로 후원하셨다. 모친 상중임에도 이필희, 안승우 등 제자들의 간곡한 추대로 영월에서 대장이 되어 크게 전과를 올렸 다. 지평의병을 기반으로 제천에서 호좌의진을 출범시켜 충주관아를 점령하고 영남까 지 군세를 떨치는 등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최대의 연합군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 나 일본군과 장기렴군의 공격으로 충주성을 내어 주고 제천도 빼앗기게 되니,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서행(西行)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압록강을 건너갔으나 1896년 8월 회인현 파저강변에서 무장해제당해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셨다.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항일세력을 규합하시고 1910년 ‘13도의군도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