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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 24) 鄭永軫 양평 출신의 의병장으로 창의하여 일본순사와 헌병을 살해한 것으로 체포되어 1910년 2 월 17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85) 25) 曺仁煥(1881~1909) 양근읍 출신으로 양반 출신이다. 조인환은 군대해산 직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거의하여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의진의 규모는 4백여 명에 달했다. 86) 1907년 8월 3일 양근 읍내를 습격하고 관아와 세무서⦁우편물 취급소⦁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 방화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8월 5일에는 지평의 순사파출소, 8월 12일에는 양근순사파출소, 8월 19일에는 지평군아를 공격하여 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카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공격을 받고 9월 상순 양주⦁파주 지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상원사 와 용문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인환은 9월 17일 다시 양근으로 들어와 남종면 의 分院洞 남방의 고지에서 일본군 수비대 제47연대 제1소대와 격전을 치러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조인환의 그후의 행방이 묘연하자 잔여의병들은 해산군인인 申昌鉉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활동하였다. 87) 그는 그 후에도 이천⦁여주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했으 나, 1909년 12월 20일 군수품 배분 문제로 불만을 품은 자한테 살해당했다 한다. 88)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6) 千洛龜 지평 출신으로 호는 致範이다. 李根元의 문인으로 1905년에 원용팔이 의병을 일으키자 강릉의 봉평에서 만나 참모종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89) 85) 《황성신문》, 1910년 2월 20일, 잡보, 「兩犯宣告」 86) 「폭도에 관한 편책」, 京警收秘 제 151호의 6, 융희4년 3월 7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17, 376쪽). 87) 『독립운동사자료집』3, 666⦁727쪽. 『독립운동사』 1, 474⦁500~501⦁532⦁538쪽. 88) 「폭도에 관한 편책」, 京警秘發 제151호, 융희4년 1월 26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17, 16쪽). 같은 책, 18쪽. 高秘發 제740호의 1, 융희4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