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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 으로 보인다. 51) 2) 權洛鍾 양평 출신으로 兵曹佐郞⦁全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慶賢洙⦁李喬永⦁宋洛奎⦁宋洛中⦁南夏朝 등과 함께 강원도 鐵原郡 寶盖山에서 봉기하 여 훈련중에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7개 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으나 악형으로 고생하다가 병사하였다. 52) 3) 權得洙(1873~1907) 187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恪으로 기입되었으며, 자는 成根이며 본은 안동이다. 부친 權信榮은 무과 출신으로 안동권씨 추밀공파 政丞公의 33세손이다. 53) 권 득수는 金正和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또한 그는 무장으로서의 기상도 뛰어나 무 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1905년 양평군 양근리 장로교 신자인 홍씨 부인의 집에 정착하였다. 그는 장로교 회를 개척하여 선교활동과 문맹퇴치에 헌신하는 金演玉을 만나 동지가 되어 구국을 위한 의병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젊은이를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김연옥으로부 터 교회보다 시장에서 의병을 모집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무기를 구입하였다. 소장수를 가장하고 양평⦁양주⦁이천의 장날을 택하여 격문의 붙이고 창의하 였다. 그가 창의한 때는 1907년 음력 7월로 보인다. 그는 용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양평⦁ 양주⦁이천⦁지평 일대에서 200명이 넘는 의병진을 편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54) 그는 용 문사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활동했으며,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의 나루터를 도강하려는데 일본 기병대에 발각되어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일본 헌병 2명을 사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용문산으로 51)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53쪽. 京觀發 제272호 보고서, 경기관찰사 李圭恒 내부대신 任善準 각하 (1908년 3월 3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9,338~343쪽). 52) 김승학, 『한국독립사』, 541쪽. 53) 『안동권씨추밀공파대보』. 54) 조선총독부 경무국 편, 「폭도사편집자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507쪽). 이 자료에 의하면, 권득수를 “소장사를 하던 자인 바 한때 부하 200여 명을 인솔하고 지평, 양근, 이천, 양주의 각지 를 배회 출몰하여 현재 소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한다.”라고 보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