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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 양평 출신으로 후기 의병기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曺仁煥⦁權得洙⦁李延秊⦁金春洙 등이 있다. 양근읍 출신인 조인환은 권득수와 함께 군대해산 직후 창의하여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 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3일 양근 읍내, 8월 5일에는 지평 의 순사파출소, 8월 12일에는 양근 순사파출소, 8월 19일에는 지평군아를 공격하여 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인환⦁권득수 의진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 아카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9월 상순 양주, 파주 지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상원사와 용문사, 사나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인환은 9월 17일 다시 양근으로 들어와 남종면의 分院洞 남방의 고지에서 일본군 수비 대 제47연대 제1소대와 격전을 치렀다. 이연년은 전기의병장 이승룡의 장자로 부친의 유훈을 이어받아 용문⦁지평⦁홍천⦁여주 일대에서 항전하였다. 1908년 3월 청운면에서 일본군수비대와의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옥천 출신으로 알려진 김춘수 역시 수백 명의 의 병을 이끌고 양평은 물론, 홍천⦁양주⦁가평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참모장에 백영기를 임 명하였으며, 이연년이 그의 종사로 활동할 정도로 그의 부대는 양평지역에서 대표적인 의 진의 하나였다. 그는 1908년 말에는 허위의 부하인 김규식 등과 연계하여 13도창의진에 참여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회유에 1909년 12월 자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밖에도 정위 출신의 권중식, 교수형으로 순국한 朴光天⦁鄭永雲, 李聖瑞⦁李昌俊 부 자, 안승우의 아들 安基榮, 김춘수 의진의 李春明 등의 행적이 두드러진다. 이들을 중심 으로 양평출신 의병들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高正卜 양평군 남시면 학곡리 출신으로 김춘수 의병진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3일 경기관 찰사 이규환이 내부대신에게 보고한 <양근의병 귀순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 아 일시 귀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 해 12월 14일(음) 양평군 용암리에 거 주하는 李春明을 비롯하여 辛元英⦁李天甫와 함께 남시면 일대에서 군수품을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한 것으로 보고 되고 있어 1908년 3월 귀순한 이후 재차 의병활동을 한 것 강 쪽에서 찍은 것이라 한다(양평군, 2000, 371쪽). 양평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중에 해산군인 출신으로는 正尉 출신의 權仲植이 있다. 따라서 군복을 입은 의병장이 권중식일 가능성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