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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연번 성명 (이명)생몰연도출신지본관자호관력 의병활동 (지역) 포상여부 및 기타 22 安鍾曄 (安鍾燁) 1864~1908지평순흥元春 지평수성장 23李福永 지평 是菴감역 류인석 의진 정선수성장 24李鳳夏 양평 양근의병 이근원의 문인 25李鳳九 지평 지평의병 참여 26李承龍1853~1896 양근 동종면 청해秀雲錦坡 강령 현감 양근의병 남한선성 입성 ‘03 애족장 이연년의 父 27李春永1868~1896지평덕수友三槐隱 중군장 수안보 전투 전사 ‘63 독립장 28林乙善?~1896 류인석 의진 지평에서 전사 ‘95 애국장 3. 양평지역의 후기의병과 의병장 1907년 8월 구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는 사태에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특히 양평지역은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강원도의 홍천 또는 경기도의 여주 일대와 인접해 있어 의병 초모, 또는 군수품 조달 등에서 유리한 조 건에 있었다. 또한 양평지역은 용문산이 자리잡고 있어 유격전에도 유리했다. 이에 따라 양평 출신의 많은 의병들이 활동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양평 출신은 아니더라도 양평 일 대는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양평일대에서 의병과 일본군과의 항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군대해산 직후 많은 의병들이 거의하여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사와 상원사를 근거 지로 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907년 8월 양근 읍내 및 지평등지를 습격하여 일 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지평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활발 한 활동을 벌인 의병으로는 조인환⦁권득수 의진 등이 있다. 한편 그해 11월초에는 지평의 三山里에 李麟榮 의병장의 요구에 따라 5천여 명의 의병 이 집결하였다. 이 연합의진은 이인영 의진의 약 1천여 명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2천 명 으로 증가했으며 許爲 부대 등 각지의 의병부대가 집결한 결과 5천여 명에 달했다. 이 부 대는 1908년 1월 서울탈환 작전을 감행한 13도창의진의 기간 부대가 된 이인영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