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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수연(雖然)이나 조양(調養)한 포군은 다 나의 극력하여 모은 바니 네 군사는 아니 요. 당당한 충의예 무리라. 엇지 네게 맛겨 도적을 돕게 하겠느냐. 8) 라 하고 軍案을 빼앗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軍士는 있으나 主人 없는 것이 恨이로 다”라며 경내를 돌아다녔다. 안종응은 이춘영이 자기를 찾아오자 김백선의 이러한 행적을 전해 주고 김백선을 만나게 하였다. 이춘영은 그날 밤 김백선을 찾아갔다. 둘은 의기가 투합되어 김백선이 군사를 책임지고 이춘영이 재물을 책임지고 26일에 안창에서 거의하 기로 약속하였다. 김백선은 포군들에게 통지하여 안창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김백선은 그 들에게 말하기를 “나나 그대들이 모두 시골 백성으로 비록 나라의 녹을 먹지는 못하였지 만 우리가 입은 옷이나 우리가 먹는 밥이 그 어느 것이 임금의 주시는 물건이 아니랴. 이 런 망극한 변을 당하여 어찌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아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 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따르기를 맹서하였다. 김백선은 安承禹와 합세하여 크게 창의의 깃발을 드니 때는 1896년 1월 12일이 안창에 서 이춘영⦁안승우 등과 함께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이들은 원주 사람 金思鼎을 總督, 朴雲瑞를 都領將에 임명하고 원주 군사들을 더 소모 고 1월 17일(음 12월 3일)에 충청도 堤川을 점령하였다. 이필희를 의병장에 추대하고 자 신은 선봉장이 되었다. 단양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관군의 추격에 영남지역으로 퇴각하 였다. 그 후 영월에서 毅菴 柳麟錫이 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김백선은 선봉장에 임명 되어 忠州城 전투와 可興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3월 27일(음, 2월 14 일) 그는 가흥전투를 수행 중에 요청한 지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자 회군하여 중 군장 안승우에게 칼을 들고 대어드는 소동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류인석은 군의 기강을 세운다며 ‘泣斬馬謖’의 심정으로 김백선을 처형하고 말았다. 9) 김백선의 처형은 당시 군중에 미친 영향도 컸지만 의병사상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騎驢隨筆』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적병이 앞에 있고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니 비록 보통 군사라도 될 수 있는 대로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여야 할 터인데, 더구나 호걸스럽기 백선 같고 용맹 하기 백선 같은 사람이랴. 그의 죄라는 것이 일시 분을 참지 못한 것뿐인데 개과 8) 『의병사시말』 참조. 「육의사열전」의 ‘이괴은전’에 의하면, 김백선이 맹영재를 찾아가 “이런 큰 변을 당하여 나라의 신민이 된 자는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마땅히 죽음을 걸고 적을 무찔러 살아서는 옳은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옳은 귀신이 되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당장에 병부를 찬 인신으로서 위로 임금의 치욕을 급히 씻지 못하고 아 래로 창생의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다면 고을에 수령은 두어서 무엇 하느냐” 면서 동헌에서 총을 부셔버리 고 집으로 돌아와 칼을 갈며 자결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의사열전보다 「의병사시말」 의 내용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도 사실적이어 이를 이용하였다. 9) 박정수, 위 글, 408쪽, 위 족보에는 사망일이 2월 15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