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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 인구가 45,200명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보다 80년 후인 1987년 양평이 20,006호에 인구 가 81,331명임을 볼 때 인구의 증가가 크게 없었음을 알 수 있다. 3) 3. 양평지역의 전기의병과 의병장 1895년 11월 단발령의 공포 후에 이춘영⦁안승우 등 지평 출신의 華西學派의 문인 및 김백선과 그 추종 세력은 이를 국가의 위기로 인식하고 砥平義兵을 일으켰다. 지평의병은 1896년 1월 12일 원주의 안창에서 거의하여 원주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때의 의병의 수는 1천여 명에 달했다. 1월 17일에는 제천관아를 점령하였다. 제천 일대에서 서상렬⦁이필희 ⦁이범직 등 화서학파 문인을 비롯하여 의병이 합세하였다. 제천군수는 도주하였으며 의 진에서는 대장에 이필희를, 군사에 서상렬을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 안승우는 군중도 유사, 김백선은 선봉장을 맡았다. 지평의병은 1월 19일에 단양의 장회협 전투에서 친위대 1개 중대와의 첫 전투를 수행하 였다. 이 전투에서 서상렬과 김백선이 거느린 포군은 추격해 온 관군을 장회협의 협곡에 서 매복해 있다가 급습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 후에 지평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재공 격에 대비하고자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의병을 증모하여 항쟁하고자 한 의도였으 나, 오히려 의병은 대오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지평의병이 해산된 뒤에도 이춘영⦁안승우⦁김백선 등은 유인석의 휘하에서 중군장⦁전 군장⦁선봉장 등 지휘부를 맡아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군장 이춘영은 1896년 2월 26일 수안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를 이어 중군장의 책임을 맡은 안승 우 역시 5월 25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김백선은 불행하게도 군율을 위 반했다는 이유로 의진 내에서 죽고 말았다. 한편 양근 출신의 李承龍은 양근지역에서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항쟁하다 가 관군의 꼬임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보다 앞서 廣州 출신의 구연영이 이천에서 의 병을 일으키고 양근과 지평으로 와서 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이 천수창의소의 주력부대의 하나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이승룡 역시 양근의 의병들을 이끌고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기의병기 양평출신의 의병으로는 이춘영과 김백선, 안종응⦁안승우 부자, 이승룡 등을 비롯하여 김백선과 함께 종군한 김진덕, 그리고 손덕화⦁손용문 부자, 김성화⦁김정순⦁ 김용준 등 다수의 포군들이 있다. 이들 중에서 알려진 의병들의 행적을 약술하기로 한다. 3) 편찬위원회, 『양평군지』, 1991, 90~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