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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일제는 각 지역의 수비대와 경찰서, 헌병대뿐만 아니라 행정기관과 선유위원들로 하여금 귀순자들을 받아들이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양근과 지평의 귀순자들은 대부분 김춘수⦁최 태평⦁김상진⦁이연년⦁권득수⦁丁大武 등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자들이었다. 아울러 일제는 1907년 11월부터 1908년 초까지 전국의 面⦁坊⦁社마다 自衛團을 편성 케 했는데, 당시 경기도에서만 163개의 자위단이 결성되었다. 44) 자위단은 의병의 예방과 감시기구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일제의 최종 목표는 의병을 종식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일제는 회유책과 더불어 강력한 진압이 양평지역에 집중되자, 여러 의병부 대가 일시 해산하거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13도연합의병이 결성되면서 양주를 중심으로 항쟁을 주도해 가자, 양평지역 의병활동은 점차 위축되어 갔다. 4. 양평지역 후기의병의 쇠퇴와 새로운 모색 1908년 초반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된 이후 양평의병의 투쟁열기도 식어간 듯하다. 하 지만 얼마 안 되어 경기지역 의진들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1908년 중반 이후 경기 서북 부지역과 임진강 유역의 의병항쟁은 크게 확산되었다. 반면, 양평을 비롯한 경기 동남부 지역의 의병투쟁은 좀처럼 예전과 같은 열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45) 의병항쟁의 중심지가 경기도 동남부에서 서북부 지역으로 바뀐 것이다. 경기 서북부지역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의병부대로는 이인영⦁尹仁淳⦁鄭容大 등이 이끄는 倡義元帥府, 해산군인 출신 金龍基⦁ 池洪一이 지휘한 倡義突擊陳, 李能權이 통솔한 大東倡義陳, 延基羽가 이끄는 東韓倡義尊 攘軍帥府, 金秀敏이 소속된 倡義都督府, 해산군인 출신의 姜基東 등이었다. 한편, 양평의병을 주도했던 조인환⦁김춘수 의병부대는 1908년 중반이후 체포⦁전사⦁ 자수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예컨대, 이 시기에 조인환 부대에서 활동했던 신창현은 체포 되었고, 김춘수 부대의 종사였던 金應西은 전사했으며, 김춘수 부대의 참모장이었던 白永 基는 귀순하였다. 46) 그리고 1909~1911년 사이에 양평에서 활동했던 대표적 의병장 가운 데 조인환은 피살되었고, 김춘수는 귀순했으며, 최태평⦁朴正文⦁朴君先⦁鄭永珍 등이 명 맥을 이어갔다. 47) 간혹 경기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부대가 양평으로 들어와 일시적으로 활 동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1910년 6월 姜基東은 양주에서 양근군 南終面으로 44) 졸고, 「1907~8년 日帝의 自衛團 조직과 한국인의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3, 1995, 110~111쪽. 45) 김순덕, 앞의 논문, 163쪽. 46) 김순덕, 앞의 논문, 166쪽. 47) 위와 같음,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