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page

428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고 하겠다. 1907년 8월경 양평지역 의병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당시 양평의병은 약 200~400명 규 모로 편성되었다. 유격전을 위주로 하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양평의병의 규모가 상당 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군대해산에 항의하여 봉기한 서울 시위대와 원주 진위대에서 흩어진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투신함으로써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제고되었다. 그리하 여 이들은 한층 발전된 전술과 보강된 무기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 한편, 양평을 중심으로 한 경기 남동부지역은 의병들의 주요 활동무대 로 이용되었다. 17) 이를테면 원주에서 창의한 李麟榮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로 집 결할 때 원주-제천-양근-지평 등지를 거쳐 이동한 점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제 양평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인근지역까지 세력을 떨친 의병부대의 활동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양평지역에서는 양근읍 출신의 조인환이 소장수로 불렸던 권득수 18) 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龍門山으로 들어가 上元寺와 龍門寺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19) 이들은 1907년 8월 3일 오전 의병 100여 명으로 당시 지평군 분파소와 관사를 습격하였 으며,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權化京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규모를 400~500명으로 증 강시켰다. 그리하여 양근읍을 공격하여 군아⦁세무서⦁우편취급소 및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하거나 방화하였다. 이들은 다시 지평분파소와 관사를 공격, 파괴한 다음 같은 달 12 일 양근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공격하였으나 이미 일본인들은 도망간 뒤였다. 이들은 양 근세무서에서 서류와 세금 100원을 몰수한 후 세무주사를 처단하려 하자, 의병장 조인환 은 “吾等이 大事를 經營l 我國人命을 殺害 것이 不可다”며 살려 주었다. 20) 이 밖에도 지평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강원도 홍천으로 이동하여 일본인 전당포와 우편 취급소를 파괴하였으며, 17일에도 다시 양근 읍내를 습격하여 우편취급소를 거듭 파괴하 였다. 19일에는 또다시 지평군아를 공격하여 일본군에게 음식을 접대한 군수 金泰植을 포살한 뒤 일부 의병들은 한강 상류에 있는 高浪津을 습격, 나룻배를 모두 거두어 파괴함 으로써 충주에서 올라오는 진압군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21) 또한 의병장 조인환은 全性煥 과 羅應完을 상경시켜 前 協辦 嚴柱益에게 군자금 10만 냥을 강요하였다. 22) 하지만 전성 16) 김순덕, 앞의 논문, 37쪽. 17) 위의 논문, 38쪽. 18) 권득수는 자료에 따라 得守⦁德守⦁德洙⦁恪⦁成根(字)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부하 200명을 인솔 하고서 양근 지평 양주 이천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강원도 춘천 홍천 등지로 옮겨 활동하였다. 그 후 閔肯鎬 의병부대와 합진하였으며, 許爲의 지휘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黃在鎬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활동 하다가 불화가 생겨 그들에게 피살되었다(김순덕, 앞의 논문, 38쪽의 각주 144 참조). 19) 김순덕, 앞이 논문 38쪽. 20) 《황성신문》 1907년 8월 20일자 「稅主免禍」.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8일자 「稅主被打」. 21) 김순덕, 앞의 논문, 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