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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평의 전기의병 역시 충북 제천의병과 합진하여 활동하다가 류인석의 渡滿을 계기로 해산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탈이 계속 이어지자, 한국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1904 년에 이르러 ‘한일의정서(2.23)’와 ‘제1차 한일협약(8.22)’등이 체결됨으로써 일본군이 국 내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인들이 한국 정부의 顧問이란 미명 아래 내정을 간섭하였 다. 당시 일제는 외교와 재정 부문의 간섭뿐만 아니라 군대의 주둔과 군용시설의 설치, 철도 부설 및 통신시설의 설치 등을 빙자하여 토지를 약탈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 대한제국은 일제의 반식민지 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기지역 주민들은 일제의 노동력 징발조처에 크게 반 발하였다. 이와 같은 주민들의 반일적 분위기가 경기지역 의병봉기를 촉발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04년부터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전까지 경기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자층은 약 20 명 정도로 확인되었다. 3) 그 이후부터 1908년 2월까지 약 7개월 동안 의병지도층은 244 명으로 파악 4) 된 바와 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후반까지 약 400명 내외의 의병지도층이 경기지방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5) 물론 그 후에도 경기지역은 1911 년 초까지 의병의 활동이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쇠퇴하였다. 이로써 볼 때 1907년 7~8 월을 분수령으로 삼아 경기지역 의병이 크게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04년부터 일어난 의병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편 이다. 대체로 《皇城新聞》⦁《大韓每日申報》등의 신문기사를 통해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 을 정도이다. 양평지역만 하더라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의병이 일어났음을 확인 할 수 있다. 6) 당시 강원도 洪川에서 봉기하자는 의병장의 통문이 砥平에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이들은 “爲國報忠”⦁“爲民保安” 등을 내세웠다. 保國安民의 기치아래 의 병을 일으키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평에서는 1905년 5~6월경 의병이 다시 봉기하였다. 7) 당시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한 의병부대는 대략 14개 정도였다. 8) 그 중 李範壽⦁具萬書⦁李文鎬⦁沈相禧 등이 이끄 3) 金順德, 「京畿地方 義兵運動 硏究(1904~1911)」, 한양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16쪽, 필자는 김순덕 의 박사학위논문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이 글을 완성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특히 , 의병활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주도 인물의 행적 등의 이해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에 특별한 논지를 주장 하는 경우가 아닌 한 각주를 생략했음을 밝힌다. 4) 김순덕, 위의 논문, 15쪽. 5) 위와 같음. 한편, 김순덕은 경기지역 의병들을 대체로 서부 지역, 임진강 유역과 동북부 지역, 그리고 남동 부 지역 등 세 권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위의 논문, 13쪽 각주 44 참조). 이로써 볼 때 양평은 경기 남동부 권역에 속한다고 하겠다. 6) 《황성신문》1904년 9월 22일자 「義兵通文」참조. 7) 김순덕, 앞의 논문, 23쪽 8) 김순덕, 앞의 논문, 20쪽. 그런데 이 중 金萬洙는 1907년 음력 6월초에 활동한 것으로 보건대 앞의 열거